메뉴 건너뛰기

close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라는 취지로 발동되었던 천정배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에 대해서 김종빈 검찰총장이 사표제출로 답했다.

물론 검찰청법 8조에 명시된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수용하지 않을 도리는 없기에 이를 수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새삼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세인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단연 김 총장의 사표제출이다.

김 총장의 사표제출은 그가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을 수용하건, 수용하지 않건 간에 불가피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실정법에 엄연히 명시되어 있는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를 거부하고도 총장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평검사들 일부의 조직적 반발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를 수용한다는 것은 검찰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조직의 명예(?)를 수호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에 총장직을 유지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김 총장의 사표제출은 자의 반, 타의 반의 결과물이라고 평해도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가 부당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특기할 점은 전격 사표를 제출한 김 총장이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법무장관의 부당한 수사지휘권 발동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며 천 장관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 "(자신의)사직서 제출이 장관의 수사지휘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기실 김 총장이 천 장관이 행사한 수사지휘권을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에도 검사들 중 일부는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가 적법한 것이긴 하지만 부당하니 이를 총장이 거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총장의 위 인터뷰 내용도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 총장에게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부추겼던 '조중동' 등의 주류언론과 한나라당은 물론이거니와 김 총장 본인과 일부 검사들조차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가 어째서 부당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이나 검찰권 침해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지만 이는 극도로 추상적인 구호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가 검사들 자신이라는 점에서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할 것이다.

특히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 마치 무슨 검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도 되는 냥 기염을 토하고 있는 평검사들의 행태는, 작년 가을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명품(?)을 제작하여 전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헌법재판관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어떤 사회적 사실 혹은 관습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오직 헌법재판관들 뿐이었던 것처럼-그럼으로써 이들은 사실상 헌법제정권자가 되었다-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가 정당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검사들 뿐이라고 일부 검사들이 확신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자기과신에 불과하다. 주지하다시피 형사사건에 있어서 무죄추정의 원칙과 불구속 수사의 원칙-법률이 정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은 매우 중요한 대원칙이다.

법률이 정하고 있는 인신 구속의 사유는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는 때,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 등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신체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인신 구속사유는 매우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 교수에 대해서 불구속 수사를 지휘한 천 장관도 바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설혹 공안사건이라 할지라도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구속사유에 해당되지 않으면 불구속 수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은 인신구속 남발에 대해 경종을 울림으로써 인권보호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일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인권옹호에 앞장서야 할 검찰이 해야 할 일을 법무장관이 한 셈이니 검찰은 오히려 천 장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또한 천 장관이 강 교수에 대한 수사중단이나 불기소처분을 지휘한 것이 아닌 바에야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검찰권을 훼손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결국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가 부당하다는 김 총장과 일부 검사들의 강변은 자신들의 구속의견을 반려하고 불구속 수사를 지휘한 법무장관에 대한 항명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서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통령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장관이, 막강한 검찰권을 행사하는 검찰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치임을 감안할 때 국민주권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는 움직임인 것이다.

그 결기를 전두환에게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대한민국 검찰이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서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검찰을 인권옹호의 보루라거나 엄정한 법질서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찾기 힘들다. 그 보다는 권력의 시녀 혹은 강압수사의 음습한 이미지로 기억되곤 한다.

문제는 과거 검찰의 과오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해야 할 당사자인 검찰이 그럴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적법하고도 정당한 수사지휘권 행사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항명하는 모습을 어찌 보일 수 있었을까 싶다.

검찰권 독립(?)을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진 김 총장의 결단이 비장하게 여겨지기보다 희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작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부당한 외압에 맞서 검찰권 수호를 위한 결기를 보여줘야 할 때는 이에 철저히 굴종했던 검찰이 민주정부 하에서 정당히 행사되고 있는 지휘권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은 이번 수사지휘권 사태를 통해 일부 검사들이 원하는 것이 정치권력에 대한 독립이나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그 어떤 통제나 감시로부터도 자유로운 검찰권력의 추구가 아닌가 하는 짙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번 수사지휘권 파동이 거둔 성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에 대한 통제와 견제 장치가 긴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다행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 검사는 범죄수사 및 공소제기와 그 유지에 필요한 사항, 범죄수사에 관한 사법경찰관리의 지휘 및 감독,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의 청구, 재판집행의 지휘 및 감독 등을 수행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을 통제하거나 견제할 장치가 지나치게 미약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가 검찰에 대한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대한민국 검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번 수사지휘권 행사에 대한 집단항명은 민주화가 진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검찰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모쪼록 이제라도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겸허히 되새기는 대한민국 검찰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태경 기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대자보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