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30 14:43최종 업데이트 23.07.3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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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7일 해운대구 부산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진행된 유엔군 참전의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23.7.27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 및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미군과 유엔군에 경의를 표했다. "유엔군 참전용사 여러분, 오늘의 대한민국은 유엔군의 희생과 정신 그리고 피 묻은 군복 위에 서 있습니다"라며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희생과 헌신으로 공산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미국과 한국전쟁 참전국들을 겨냥한 립서비스로도 볼 수 있지만, 한미동맹 및 한일 안보협력에 올인하는 윤 대통령의 모험은 그것이 립서비스가 아님을 웅변한다. 지난 19일에도 그는 김건희 여사와 함께 미국 전략핵잠수함 켄터키함에 올라 "직접 눈으로 보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들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그가 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은 지난 14개월간 충분히 증명됐다.


지도자가 자국 국민도 아니고 자국 군대도 아니고, 강대국의 군대에 의존하는 것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손을 잡고 제3자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라며 "이런 경우, 승리를 거둔다 해도 동맹국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라고 경고했다.

꼭 먹이가 되지 않더라도 위험하다. 외국군에 의존하면 자국민과 자국 군대를 살리는 일을 그만큼 등한히 하게 된다. 자기 나라를 좀먹는 이런 행동은 자국 국민과 군대를 믿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전두환과 박정희의 동맹 의존... 그 결과는?
 

1981년 2월 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진행된 전두환-레이건의 한미 정상회담. ⓒ 국가기록원

 
윤 대통령이 "정치는 잘했다"고 호평하는 전두환은 레이건 행정부 및 나카소네 내각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지나치게 치중했다. 그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내 기반이 그만큼 취약했기 때문이다.

1980년 '서울의 봄'과 '5월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은 한국 국민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의 정치 기반이 될 수 없었다.

한국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대를 기반으로 철권통치를 했다지만, 그의 정권 찬탈을 도운 부대는 수도권에 한정돼 있었다. 그가 동원한 부대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 부대들은 그가 자비를 들여 양성한 사병부대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지휘권 내에 들어온 공적 병력일 뿐이었다.

당시의 주한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재임 1978~1981)은 1999년에 펴낸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전두환의 쿠데타 직후인 1980년 1월 마지막 주에 한국군 장성이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구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당시 전두환을 반대하는 장성 30여 명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증언이다.

사정이 그랬기 때문에, 전두환 입장에서는 한국 국민은 물론이고 한국 군대도 신뢰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은 그가 한미동맹 및 한일 안보협력에 더욱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허망한 의존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 7년 만인 1987년에 6월항쟁을 맞아 사실상 몰락할 때, 나카소네의 나라는 물론이고 레이건의 나라도 전두환을 돕지 않았다.

동맹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허망하다는 인식은 집권 7년 뒤의 박정희에게서도 나타났다. 한미일 삼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협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박정희가 미국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5·16 쿠데타 7년 뒤인 1968년에 연달아 일어났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 무장공비 특공대가 청와대 1km 앞까지 침투했고, 1월 23일에는 미군 선박 푸에블로호와 선원들이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나포됐다. 박정희는 미국이 방어하는 한반도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점 때문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두 사건 직후에 미국이 보여준 태도 때문에도 충격을 받았다.

철통같은 한국 방위를 약속했던 미국은 두 사건 어느 것과 관련해서도 북한을 군사적으로 응징하지 않았다. 핵항공모함 같은 전략자산을 한반도 인근에 파견했을 뿐, 실질적 타격을 줄 만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미국은 1월 21일 사건보다 1월 23일 사건의 처리에 더 주력했다. 자국민 보호가 더 중요하므로 그렇게 했겠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사안에 미국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미국이 23일 사건만 처리하고 21일 사건은 방치하지 않을까 하고 박 정권이 염려했다는 점은 '두 사건을 대등하게 처리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그해 2월 8일 자 <조선일보> 기사 '대미 자세 재검토 촉구'에 따르면, 전날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김대중 신민당 의원의 질의를 받은 최규하 외무부 장관은 "푸에블로호 사건과 공비 사건을 똑같이 취급할 것과 푸에블로호 사건의 종결로 한국의 긴장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전·사후에 우리 정부가 그 내용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미측에 명백히 요구했다"고 발언했다.

푸에블로호 사건뿐 아니라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줘야 하며 한국 몰래 북한과 비밀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이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촉구했지만, "강한 자"는 한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한미일 협력체제를 위해 국민들의 욕을 먹어가며 한일협정을 강행하고 베트남에 군대까지 파견해 준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의아하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 대통령은 언제 깨닫게 될 것인가
 

1965년 5월 17일, 박정희 대통령과의 연회에 참석한 린든 존슨 대통령(가운데). 린드 존슨 재임기에 1.21 무장공비 침투와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이달 27일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이 축사한 것과 맥이 닿았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참전국들을 상대로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2월 3일 자 <매일경제> 1면 최하단 기사는 "정부는 최근 북괴 도발행위의 재발 방지와 한국 안전보장책의 일환으로 미국을 비롯한 6·25 참전 16개국에 주한 병력 증강을 정식 요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참전 16국의 군대 증파를 요청하겠다는 말의 속뜻은 미군의 증파를 요청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상외로 미국이 움직이지 않으니, 한국전쟁과 참전 16국을 운운하며 미국의 반응을 살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의 대남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고 미국은 북한에 타격을 가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15일에도 북한이 미국 정찰기 EC-121기를 동해상에서 격추했지만, 이때도 미국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1·21 사태 및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 집권 7년 만의 그 깨달음이 1968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 치사에 반영됐다.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집> 제5집에 수록된 이날 치사에서 그는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심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라며 자주국방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남이 도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움이라고 생각해야지, 우리 대신에 남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켜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 뒤 "나는 이것을 국방의 주체성이라고 말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이 언급한 '남'이 국방 문제로 갈등 중인 미국임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자기 나라는 자기 스스로 지키겠다는 결심이 없는 국민을 남이 와서 도와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며 미국이 남이라는 것을 재차 상기시킨 그는 "민족의 생명은 민족의 주체성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월 21일부터 한달 여 동안 그의 머릿속에 축적된 대미 의식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집권 7년이 되도록 등한시하던 자주국방을 갑자기 부각시키는 그의 행동은 미국의 의심을 초래해 정권 기반을 불안케 만들었다. 국민들과도 척을 진 상태에서 최대 후원자인 미국과 갈등을 빚게 됐기 때문에 그의 정권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적 지원을 배경으로 미국과 맞서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었다.

전두환은 집권 7년 만에 6월항쟁을 맞이했지만 미국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정권의 쇠락을 겪었다. 박정희는 집권 7년 만에 한미동맹의 허무함을 깨달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은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집권 7년 만에' 깨달을 기회가 주어질 수 없다. 그때 깨닫게 된다면, 그곳은 대통령실이나 관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집권 5년 이내에' 깨달음을 얻을 것 같지도 않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놓고도 항상 확신에 차 있는 듯한 모습은 그의 득도 가능성을 점점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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