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4 09:10최종 업데이트 23.07.2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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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8일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시민들이 '친일인명사전'을 살펴보고 있다. ⓒ 유성호


'언론 통폐합' 하면 흔히 전두환 때인 1980년이 떠오르지만, 일제 때인 1930년대 후반의 언론 통폐합도 규모가 상당했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이로 인해 한민족 언론의 명맥이 자칫 끊어질 수도 있었다. 숭실대학교가 기증받은 조선총독부 극비 문서를 다룬 1989년 10월 18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 중 '언론기관 통제 지도책'(1939년), '한글 신문 통제안'(1940년),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보 쇄신 강화책'(1939년) 등 언론 관계 자료들은 대동아전쟁을 앞두고 조선의 민족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극비 보고서. 이에 따르면, 조선 내 68개 신문·잡지·통신에 대한 통폐합 작업을 실시, 중앙지의 경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합병하고, 지방지는 1도 1사 원칙에 따라 3개년(1939~1941)에 걸쳐 통폐합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전쟁 분위기에 편승한 이 같은 대대적인 언론 탄압에서 실무를 담당한 한국인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정훈(鄭勳)이 바로 그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은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조선 주둔 일본군 예하 사단에서 복무하였고, 1937년 10월부터는 군사령부에서 언론·문학·예술 및 일반 여론을 상대로 한 감시와 통제 업무를 수행"한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비중 있는 업무를 수행한 것치고는 신상 정보가 별로 없다. 1909년에 육군무관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1900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출생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훈 편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09년 7월 학교가 폐지되면서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육군유년학교에 예과 2년생으로 편입했다"고 한 뒤 1913년에 본과를 졸업했다고 기술한다. 그런 다음, 그해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5년 5월 졸업한 뒤 12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언론 및 선전 분야에 투입된 것은 소좌(소령) 때인 1937년 10월이다. 언론통폐합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부 신문반에 투입됐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제시된 1937년 10월 20일 자 '조선군 신문반 업무담임 분담표'에 따르면, 임시 직원과 정직원을 포함한 신문반 구성원 9명 중에서 한국인의 성을 가진 사람은 2명이었다. 창씨개명령이 공포(1939.11.10)되기 2년 전인 이 시점에 한국인 성을 가진 사람은 정훈과 유씨(임시 직원)뿐이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아야 업무 수행이 수월한 이 부서에 한국인이 적었던 것은, 한국인의 의식을 통제하기 위한 부서에 한국인을 배치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부서에서 유일한 한국인 정직원이었다는 것은 정훈이 그만큼 신뢰를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문인들의 친일 활동 주선하는 역할
   
정훈이 담당한 업무는 "조선인 사상단체 또는 일반 여론에 관한 조사, 한글 신문 잡지의 지도, 한글 신문 발표안의 제작 및 발표, 영화·최물(催物)·방송의 지도"가 있었다고 보고서는 설명한다. 언론 통제뿐 아니라 영화·연예행사·방송 지도에까지 관여했던 것이다.

조선군 신문반은 1938년 10월 당시에는 조선군 보도부로 확대 개편돼 있었다. 이때도 정직원 8명 중에서 한국인 성을 가진 사람은 정훈뿐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최물' 지도 업무가 아쿠타가와 소좌에게 넘어간 점이다. 정훈의 업무가 언론 통제 쪽으로 한층 집중된 셈이다.

정훈은 선전 장교치고는 다소 특이했다. 언론을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통제하는 언론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이자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한 것이 그 일례다.

역사학자 임종국이 1966년에 펴낸 <친일문학론>에 따르면, 1941년 8월 12일에 개편된 조선문인협회 평의원 명단에 정훈이 끼어 있었다. 이곳에서 정훈은 문인들의 친일 활동을 주선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이광수·박영희·유진오 등이 육군지원병훈련소를 견학하고 좌담회를 여는 활동을 주선했다고 서술한다. 친일 문인과 일본군을 연결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자신이 문인의 역할도 수행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8년 2월 23일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공포되자,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충량한 신민이 영예로운 국방의 임무를 지게 된 것을 축하하는 개인 담화를 발표했다"라며 "이후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 신문·잡지에 여러 차례 기고"했다고 설명한다.
 

1939년 7월 4일 자 <매일신보> “‘반도부인에게 고함’ 일사보국할 여자의 교양이 모성애의 진정한 발휘이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고문에서 그는 한국 청년들을 "영예로운 국방의 임무"로 내몰기 위해 한국 어머니들의 모성애를 비판하는 접근법을 선보였다. 1939년 6월 30일에 조선군 보도부장 명의로 발표한 '반도 부인의 심정에 대하여'라는 담화문이 그것이다. 이 담화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그해 7월 4일 자 <매일신보>에 '반도 부인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 기고문이 나온 1939년이란 시점은 지원 형식으로 한국인을 입대시키는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된 이듬해이자 징병 형식으로 입대시키는 한국인 징병제도가 시행되기 4년 전이었다. 지원 형식의 한국인 입대를 독려하는 위 기고문은 '반도 부인들' 중에서도 중류층이나 상류층을 겨냥한 글이다. 이 글의 2탄인 7월 5일 자에서 그 점이 드러난다.

2탄에서 그는 "중류 이상의 가정이나 부자의 가정에서는 지원자가 전연 나오지 안엇다"라며 중·상류층 한국인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었다. 그는 '그들 인간' 혹은 '그 인간들'로 번역되는 '피등(彼等)인간'이란 한자어를 사용해 가며 이렇게 비판했다.

"피등인간은 자기가 지원병제도나 징병제도의 실시를 소리놉히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실시됨에는 자기의 자제와 형제는 지원시키지 안코 평연히 안젓는 것은 무슨 경우이냐 말이다."

모성애 운운하며 지원 독려

한국인도 일본군에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부 중상류층 한국인들이 지원병제 시행 1년이 넘도록 '평안히 앉아 있는' 모습이 일본 정부의 눈에 부담스럽게 비쳐졌던 모양이다. 지원 형식이든 징병 형식이든 서민층 청년들만 끌려가는 모습이 연출되면 한국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래서 정훈이 나서서 "무슨 경우냐 말이다"라며 중상류층 여성들을 꾸짖는 담화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는 중상류층 여성들을 상대로 "사랑스런 아들은 여행을 시켜라", "간난은 너를 옥으로 만든다"라고 한 뒤, 자녀에게 "괴롭지!" 혹은 "가엽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진정한 모성애와 무관하다고 말했다. "괴롭지! 가엽다 하는 일시적 애린(哀憐)의 정에 끌려 자녀의 하자는 대로만 하는 애(愛)는 진정한 애라고 할 수 업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는 "단련된 체격과 최후의 력(力)은 사(死)라는 즉 일사보국(一死報國)의 혼"을 심어주는 어머니가 진정한 어머니라고 주장했다. 죽을 힘을 다해 일본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정신을 주입시키는 것이 진정한 모성애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지원병이든 징병이든 어차피 끌려가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도 자원하는 형식으로 끌려갔고,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모성애를 운운하며 지원을 독려하는 정훈의 선전이 있건 없건 간에 청년들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정훈의 엉터리 모성애 강의가 중상류층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선전전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효과가 있었다. 그의 선전전은 일본이 한국 청년들의 군대 지원을 직접 압박하지 않고, 모성애를 움직여 간접적으로 촉구하는 듯한 이미지를 조장할 수 있었다. 군인 강제동원의 강압적 성격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또 '너희는 왜 가만 있느냐'며 중상류층을 질책하는 조선군 보도부장의 모습은 일제가 한국인들 사이의 계층 위화감에 신경을 쓰는 듯한 이미지도 조장할 수 있었다. 군인 강제동원의 주된 피해자가 서민층인 현실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었다.

정훈은 일본 중앙육군유년학교에 재학 중인 상태에서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했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중좌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35년간 일본군의 테두리 내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은 그 기간 동안 벌어들인 친일재산에 기초했다.

그는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일제강점기판 언론 통폐합을 최일선에서 수행했을 뿐 아니라, 진짜 모성애를 운운하며 대민 선전전에도 참여했다. 그런 뒤 그는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 여성에게 인생을 의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가서 처가가 있던 후쿠치야마에서 살았는데,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라고 알려준다. 그래서 출생 연도뿐 아니라 그의 사망 연도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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