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6 13:42최종 업데이트 23.04.2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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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3년 4월 25일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에 헌화한 뒤 용사들을 기리고 있다. ⓒ AP=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대일 굴욕외교를 하는 중에 미국을 국빈 방문하게 됐다.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박정희 대통령도 1965년 5월 17일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 이뤄진 이 국빈 방문에 대해 박 정권의 열의는 대단했다. 그해 2월 25일 자 <경향신문> 2면 좌상단 기사는 "주한미대사관과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이면으로 여러 차례 그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미측은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정을 자꾸만 뒤로 미루어왔다"고 썼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때문에라도 박정희를 빨리 만나는 게 좋았다. 그런데도 한미정상회담을 미룬 것은 더 다급한 현안 때문이었다. 위 기사는 "이번 방미의 가장 초점이 되는 문젯점은 한일 교섭의 타결과 이를 토대로 새로이 전개될 한미일 삼각관계의 대공방위 문제"라고 한 뒤 "미 국무성은 한일 교섭의 타이밍을 세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올해 1월 7일 자 <요미우리신문> 기사 '히로시마 서밋에 한국 대통령 초대 검토'가 보도된 이후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 처리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초청 건을 연계했다. 일본의 희망 대로 강제징용 문제를 봉합하면 G7 회의에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일회담 다 끝나면 와라

그런 식으로 사토 에이사쿠 총리뿐 아니라 존슨 대통령 역시 박정희와의 회담을 한일회담과 연계했다. 박정희가 어떻게 하는가를 봐가며 그에 대한 초청 건을 저울질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을 성사시킨 1965년 2월 20일 이후에야 박정희 국빈 초청 문제를 매듭짓게 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오로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한일협정 체결을 희망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양국의 최대 목적은 이를 통해 한미일 삼각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은 그 일환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삼각체제 구축이 전범국가의 굴레에서 좀더 벗어나고 자국의 군사적 지위를 높이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서부전선을 튼튼히 하는 일이었다. 이는 태평양만 걷어내면 북한·중국·소련과 맞닿는 미국 서부전선 바로 옆에 삼각체제라는 방어막을 하나 더 설치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각각 따로 작동하던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한데 묶어 훨씬 견고한 방어 라인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삼각체제를 만들자면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야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였으므로, 가해자가 사과하고 반성해야 이것이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그렇게 하지 않으니, 미국은 한국의 무릎을 꿇리는 방법으로 억지 화해를 중재했다. 이것이 박정희의 굴욕외교로 이어졌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한일협정을 처리해야 한미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해 5월 26일 자 <조선일보> 1면 기사에 따르면, 국빈 방문 기간에 박정희를 동행 취재한 조용중 특파원은 본사 데스크와의 통화에서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미국에 오기 전에 한일회담 본조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고 들린다"라고 보고했다.

존슨은 처음에는 '다 끝나면 오라'고 했지만, 가조인을 끝낸 상태에서 박정희를 불러들였다. 이를 두고 그해 2월 25일 자 <조선일보> 2면에 "박 대통령의 5월 방미는 한일회담 5월 비준에 필요한 모든 타결의 매듭이 그 이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가 성립된다"고 평했다. 정식 조인을 위한 준비가 5월쯤 마무리될 것이기에 미국이 한미정상회담 일정을 5월로 잡은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한 것이다. 

이 기사의 전망처럼, 5월쯤 마무리되리라는 판단이 있었기에 미국이 박정희의 방문 시점을 그때로 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박정희는 미국을 다녀온 뒤인 6월 22일에야 한일협정 체결을 마무리했다.

국빈 방문과 한일협정 체결 사이의 간격이 1개월 정도 벌어진 데는 5월이라는 시점에 대한 박정희의 애착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에 따르면, 5월 17일이라는 방문 시점은 박정희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5·16 군사혁명 기념일 다음날"을 미국 방문일로 희망한 쪽은 박정희였다. 

한일기본조약은 식민지배 문제의 해결 없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런 조약을 가조인한 것은 박 정권이 무릎을 꿇을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과감하게 그런 모습을 보이자, 미국이 국빈 초청해 융숭하게 대접할 방침을 굳히게 됐던 것이다.

한껏 띄워준 뒤 내민 계산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연회에 참석한 린든 존슨 대통령(가운데).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996년 5월 27일 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에 실린 '종이 재활용의 중요성'이란 글은 종이 1톤 생산에 30년생 소나무 17그루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같은 이야기는 다른 데서도 나온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이 박정희 국빈 초청에 사용한 나무는 119만 그루다. 박상길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1965년 6월 3일 자 <조선일보> 4면에 기고한 글에서 박정희의 뉴욕 퍼레이드를 설명하면서 "당일 퍼레이드에 뿌려진 테이프 종이만 7만 톤에 달한다 했다"고 썼다.

거리에 도열한 환영 인파도 대단했다. 박상길 비서관은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워싱턴 퍼레이드의 경우, 미측 당국이 추산한 집계로만 그 환영 참가자가 13만을 넘었다"라고 전했다. "대개의 경우 워싱턴은 외국 원수의 방문과 행진이 하도 많으므로 보통 수천 내지 기만(幾萬)의 시민이 참관할 정도"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뉴욕의 퍼레이드에 있어서는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미국 최초의 우주인을 환영한 이래의 인파"라고 썼다. 박정희가 미국 최초의 우주인 다음으로 환영 인파를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박 비서관은 미국 언론들도 분위기 고조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 도착 이후 떠날 때까지의 미국의 모든 신문들은 대개의 경우 전면 내지 톱 기사로 대서특필하여 박 대통령의 동정을 보도"했다고 썼다.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방문한 박정희를 미국이 얼마나 열렬히 환영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그렇게 박정희를 한껏 띄워주는 와중에도 자국의 실익을 잊지 않았다. 뜨거운 환영으로 박정희가 고양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국군 베트남 증파를 관철했다. 위의 <조선일보> 조용중 특파원은 이렇게 전했다.
 
미측은 처음에는 한국군의 증파 문제를 꺼내지 않고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월남으로 빼돌리겠다고 한 데 대해, 한국 측은 '그럼 한국군 중에서 내보낼 테니 그 장비와 병력 수준에 관한 문제에 보장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정도로 들린다.
 
박 정권은 미국의 협상 전략에 넘어가 한국군 증파라는 선물을 주게 됐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를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로 포장했다.

그해 6월 1일 자 <동아일보> '김 국방장관 방미 성과 보고'에 따르면, 이날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 나가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뽑아서 월남에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미군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도록 요청했으며, 이와 같은 요청은 박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사이에 완전히 합의되었다"라고 보고했다.

미국은 일본이 아닌 한국의 무릎을 꿇리는 방법으로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그런 뒤 박정희를 일으켜 세우면서 그를 국빈으로 초청해 성대한 환영을 베풀었다. 미국이 그렇게 한 것은 자국의 서부전선을 공고히 하는 데 박정희의 대일 굴욕외교가 결정적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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