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2 13:21최종 업데이트 22.12.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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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72주년인 15일 오전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에서 유정복 인천시장과 해군 관계자 등 주요 내빈들이 동상 앞에 헌화하고 있다. 2022.9.15 ⓒ 연합뉴스

 
지금 인천광역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시는 이 작전의 기념 이벤트를 세계적 축제로 승화시키려 하고, 지역 시민사회는 이에 반발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지난 9월 15일 제72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서 유정복 인천시장은 "인천상륙작전을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버금가는 행사로 발전시켜 더 나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여는 제2의 인천상륙작전의 초석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11월 30일에는 인천시가 보도자료를 통해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9·15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기념 행사의 축제화에 대해 민주노총·전교조·정의당은 반대하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각 조직의 인천지부는 이달 6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과 미·중 갈등을 비롯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확대는 어불성설이다", "12년 전 연평도 포격의 기억이 생생한 인천시민들은 전쟁과 불안 대신 평화와 안전의 도시를 원한다"라고 표명했다.

축제로 기념할 만한 일인가

인천시와 유정복 시장은 인천상륙작전을 축제로 승화시키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고 있지만, 이 작전이 민간인 학살을 토대로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지를 따져보게 된다.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축제로 기념할 만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인천시와 유 시장은 상륙작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지역민들의 아픔을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할 사람들이 '노르망디에 버금가는 행사', '세계적 축제' 운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 정부 때 발간한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02권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은 도저히 실수로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사건이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안을 들여다보면,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고의로 일어났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미군의 월미도 폭격 후 ⓒ 진실화해위원회 자료사진

 
이 보고서는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희생되었다"라며 "폭격은 리처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라고 한 뒤 양민 희생자 규모를 이렇게 설명한다.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정용구 등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
 
신원 미확인 희생자까지 합하면 100명을 초과할 거라는 추산은 주민들의 증언이나 미군의 기록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수집한 주민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월미도 가구 수는 80~90호였지만, 제적등본에 따르면 100호가 넘었다.

또 1957년에 미군 해군이 발간한 <한국에서의 해전(The Sea War in Korea)>에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에 있는 44개 건물 중 39개가 파괴되었고, 거주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고 섬의 북쪽은 건물 80%가 파괴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보고서는 소개한다.

'건물 39개 파괴, 거주 지역 완전 파괴, 북쪽 지역 건물 80% 파괴' 같은 표현은 희생자 숫자가 상당하리라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희생자 숫자가 100명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은 과하지 않다.

잊어선 안 될 민간인 학살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매우 치밀하게 작전을 준비했다. 사전에 정찰기들을 파견해 현지 지형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랬기 때문에, 맥아더 사령관도 월미도 민간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위 보고서는 "미군이 인천상륙작전 직전 인천 지역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또 다른 방법은 항공정찰을 대규모로 반복 실시하고 항공사진을 찍어서 이를 항공측지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것"이었다면서 "월미도 동쪽 지역에 수백 명이 거주하는 민간인 마을의 존재는 당연히 이 항공사진에 찍혀 있다"라고 말한다.

미군은 작전 성공을 위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군인들을 투입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월미도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군인들도 당연히 그 대상이었다. 보고서는 "인천상륙작전 실행 당시에는 전쟁 전에 인천항 및 월미도에 근무했던 군인들이 작전 정보부서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라고 알려준다. 주민 증언에서도 이런 말이 나왔다.
 
"미군들은 해방 후 한국에 들어올 때 월미도의 민간인 마을 10m 앞에 있던 일제시대 해군기지 자리에 미군 기지를 설치했고, 1949년 일본으로 일시 철수할 때까지 여기에 진주하였다. 인천상륙 후 다시 월미도 해군기지에 들어온 미군 부대원들이 당시 철수했던 바로 그 군인들이었다."
 
월미도 미군기지와 민간인 마을의 거리는 10km가 아니라 10m였다. 미군이 민간인들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월미도 폭격 당일, 미군 전투기들은 매우 낮은 고도로 비행했다. 이는 실수로 민간인들을 오폭했을 가능성을 현저히 떨어트린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미 공군 보고서들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 보고서들에는 폭격 고도가 200피트(75.6m) 2회, 100피트·300피트·500피트가 각각 1회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500피트 1회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는 300피트(약 100미터) 이하의 높이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찰기가 육안으로 민간인을 식별할 수 있는 높이였으며, 주의하면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제네바협약'에 의해 전시의 특별한 보호 대상으로 분류된 아동과 여성 등의 존재 여부를 식별할 수 있는 높이였다"라고 설명한다.
  

미군의 월미도 폭격 후 ⓒ 진실화해위원회 자료사진

 
사전에 월미도를 철저히 조사한 상태에서, 월미도 근무 경험자들을 작전에 투입한 상태에서, 군용기들이 낮은 고도로 비행하는 상태에서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미군은 민간인들을 상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민간인들이 군용기 바로 아래에 있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 항공기들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 집중 폭격으로 동쪽 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3천 도의 고온을 내며 지름 30미터의 물바다를 만든다는 네이팜탄을 95개나 떨어트리고, 5·18 광주 학살 당시의 헬기 기총소사를 연상시키듯 민간인들 머리 위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이 아니라 민간인들을 상대로 하는 명백한 전쟁범죄가 자행됐던 것이다.

이런 일을 두고 인천시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라며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유정복 시장은 "더 나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만들기 위해 세계적 행사로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더 나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만드는 길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한을 푸는 것이 더 나은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피해자들의 한을 무시한 채 가해자 편에 서서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 공무원들과 시장이 할 일은 더욱 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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