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9 13:31최종 업데이트 24.03.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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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 평화운동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목사도 교수도 아닌 평화운동가로 살고 있다. ⓒ 황의봉

 
평화운동가 송강호 박사에게 처음 연락한 것은 지난 1월 중순이었다. 당시 그는 곧 인도네시아로 출국해 술라웨시섬의 부족 청년들을 만나 돛단배 만드는 일에 협력하고 2월 하순에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다시 귀국일에 맞춰 연락하자 이번에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국경선 평화학교에 가서 한·중·일 청년들을 만나는 일정이 있어 3월 초에나 제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결국 지난 5일 제주 강정마을의 한 허름한 컨테이너 건물을 어렵사리 찾아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를 나오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박사 송강호'는 목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평화운동가로 살고 있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외 분쟁지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그는 온몸으로 실천하는 운동가다.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다섯 차례나 투옥됐다. 지난해에는 무동력 요트를 타고 제주-오키나와-대만을 잇는 목숨 건 항해를 시도해 주목받기도 했다.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지지하는 이들이 보내준 책으로 만들었다는 작은 도서관 '강정 평화 책마을'에서 마주 앉은 그에게 안정된 삶을 마다하고 험난한 평화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연유부터 물었다.

송강호 박사와 '개척자들'

"저는 한때 교회 청년부 전도사였는데, 교회가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어떤 삶의 목적이나 과제들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과 이 시대에 우리 인생을 바칠 만한 의미 있는 과제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여행을 다니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오랜 세월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전쟁과 기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특히 내전으로 인해 식량을 공급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대량 기아 사태가 발생하는 현장을 보면서 이런 무력 충돌의 피해자들을 돕는 일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또 1998년 보스니아 내전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이 시대 젊은 그리스도인의 책무가 아닐까, 그렇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끝에 청년들과 함께 '개척자들'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됐죠.

처음엔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만, 교회는 너무 관심이 없는 거예요. 저는 교회가 엄청난 인력과 재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자원들이 교회 안에서 소모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걸 세계적인 문제들에 응답하는 데 활용하자고 교단에도 가서도 설득을 하고, 교계 어른들에게도 호소해 봤지만, 교회의 관심이나 방향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송강호 박사가 평화운동가로 나선 데에는 분쟁지역의 경험이 커다란 계기가 된 것 같다. 직접 목격한 현장의 상황은 어땠을까.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한 난민 지역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약 5만 명의 난민이 넘어와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유엔 직원이 10명뿐이었어요. 그나마 반은 자원봉사자였는데, 이분들이 정말 과로사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목도하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전쟁 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나라도 이 현장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평화를 위해서 일해라, 우리는 평화의 사람들이고, 화해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등의 구절이 나오는데, 분쟁지역에 가보니 실감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현장에서 일하는 게 목회자로 교회 안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주도한 국제구호단체 '개척자들'은 20여 년 동안 르완다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아체 등 내전 지역이나 분쟁지역의 전쟁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평화운동이 아직은 낯선 편이어서 재정적으로도 열악한 실정이다. 개척자들은 어떻게 활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개척자들을 만든 1993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평화운동은 좀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평화운동가들이 지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무소유 공동체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공동체적 삶이 평화운동가들을 지원하기에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가 활동하는 현장은 매우 위험한 곳이어서 평화운동가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남은 가족들을 돌보려면 핵 가정으로는 안 되겠다, 끈끈한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판단해 아주 적은 비용으로 사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고요.

저희 개척자들은 경기도 양평에 공동체 근거지를 마련해 살고 있습니다. 집과 식생활은 함께 해결하고, 월 30만 원을 지원받아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출을 하고 있어요. 이 돈으로 통신비 내고, 친구 만나면 식사라도 한 끼 나누고, 심지어 영화도 한 편 보고 합니다. 모두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평화운동에 관심을 가진 작은 교회나 젊은 목회자들이 주로 후원을 해주십니다. 또 저희가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여는 평화 캠프에 참여했던 분들이 돌아가서는 후원금을 보내주기도 합니다."


현재 개척자들은 6명의 활동가가 양평의 베이스캠프를 비롯해 제주와 인도네시아 아체, 미얀마 로힝야족 난민들이 있는 방글라데시 등지에 현장을 운영 중이다. 그동안 활동했던 해외 현장만 해도 1999년 동티모르를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캐시미르 지역 등 다양하다. 개척자들의 해외 현장은 주로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촌이다. 이곳에서 개척자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주로 난민촌 현지인들과 협력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난민들에게 절실한 의료지원이라든가 장애인 지원을 하고, 학교를 열어서 평화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로힝야족 난민촌 같은 경우 100만 명이나 되는 난민들이 정말 좁은 지역에 촘촘히 몰려 사는데, 지역마다 난민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희 개척자들은 현지의 난민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그분들이 하는 일을 뒤에서 지원해 줍니다.

한 예로 로힝야족의 경우 1970년대에도 난민들의 대규모 이주가 있었는데요. 당시 난민촌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성장해서 의사가 된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국적 문제 등이 있어 방글라데시에서 정식으로 의사가 될 수 없거든요. 이들이 난민촌에서 의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희 개척자들이 돕고 있어요."


기도하러 온 강정에서 맞이한 삶의 변곡점
 

구럼비에서의 기도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로 사라진 강정 해안의 길이 1.5㎞ 용암 너럭바위 구럼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 개척자들

 
2007년 정부가 제주도 강정 바닷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송강호 박사의 평화운동은 커다란 변곡점을 맞게 된다. 강정마을에 '기도하러' 왔다가 13년째 머무르며 지난한 투쟁을 하는 것은 물론, 감옥을 들락거리게 되고,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도에 오게 된 계기를 묻자 인도네시아 아체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들려준다.

"2005년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고아들을 위한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체 지역에서는 반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산악지대 게릴라전을 하고 있었지요. 당시 '아체 모니터링 미션'(AMM)이라는 스칸디나비아에 기반을 둔 단체가 아세안과 협력해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도록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2005년에 쓰나미 발생을 계기로 양측이 타협하게 되면서 반군들이 산악지대에서 막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반군이 반납한 총을 스타디움 같은 곳에서 그라인더로 자르면서 평화를 위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찌 보면 쓰나미가 재앙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이 아체에서 정말 새로운 평화의 물꼬를 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적대적인 갈등과 고문, 전투가 벌어지는 분위기에서 화해의 훈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제주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해외에서 듣는 정말 흐뭇한 소식이었습니다. 제가 아체나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이런 곳에서 전쟁 피해자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까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냥 힘으로 제압하자는 건 미친 짓이다, 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터에 제주도가 군대나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섬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환상을 갖게 된 것이죠."


'평화의 섬 제주'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하고 있던 그에게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송강호 박사의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2007년인가 제주를 와봤는데, 강정마을이 막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들썩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2010년에 다시 와보니 조용한 겁니다. 그사이에 3건의 중요한 재판에서 모두 패소한 것이었어요. 구럼비 바위를 절대보전지역에서 해제하고, 공유수면을 정부가 불법적으로 개발한 행위, 환경영향평가도 안 하고 거대한 건물을 지은 것 등이 부당하다고 제기한 재판에서 패소한 겁니다. 판결문을 보니까 피해자는 주민이 아니라 동물들이라는 상식 이하의 내용이 있더라고요.

마을주민들은 억울하지만 역시 국가와 상대하면 다칠 수밖에 없다는, 4·3의 악몽을 떠올리게 된 것이죠. 해군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마을주민들을 향해 이제 평화가 왔다, 그러니 우리 함께 상생하자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고요. 주민들은 사실상 굴복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때 이건 평화가 아니다, 정부의 억압과 강요 속에서 주민들이 굴종하고 있는 상태다, 주민들이 마음속의 이야기를 밖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4월 6일 제주의 영화평론가 양윤모 선생이 공사 감독에게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발단돼 마을주민의 분노가 폭발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해군기지 반대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해 3월 8일 제주로 왔어요. 이곳에 싸우러 왔다기보다는 기도하러 온 겁니다. 해군기지 찬반으로 갈라진 마을주민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싸우고, 삼촌과 조카가 쌍욕을 하면서 싸우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매일 아침 6시에 구럼비 바위에서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고 주민들이 정의를 말하는 용기를 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기도하러 왔다는 평화운동가 송강호 박사의 제주 생활은 10년을 훌쩍 넘겼다. 다섯 차례 투옥에 3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혀야 했다. 구럼비 바위는 그의 투쟁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구럼비는 강정 바닷가에 있던 아주 거대한 용암 너럭바위입니다. 가로가 약 1.5㎞, 폭이 넓은 곳은 한 500m, 좁은 곳은 200m쯤 됩니다. 만조가 되면 바닷물이 들어와 찰랑찰랑하다가 물이 빠지면 넓은 평상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그냥 뛰어들면 다이빙할 수 있는 그런 넓은 면이 바다를 향해 있고 앞쪽으로는 범섬 문섬 섶섬이 보이고, 뒤를 보면 한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너무도 아름다운 보물 같은 곳이지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구럼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다 시멘트로 덮여 해군기지가 돼버렸습니다.

해군기지 공사과정에서 오탁수 방지막을 규정대로 설치하지 않은 채 공사하는 것을 촬영하기 위해 제가 물속에 들어가서 촬영하는 일이 있었어요. 천연기념물 연산호가 국가 지정 문화재 442호인데, 이게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불법 공사를 촬영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돼 업무방해죄로 6개월을 감옥에 갇혀야 했지요.

2020년 3월 7일이 구럼비 폭파 8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늘 기도했던 것처럼 구럼비에서 기도하게 해달라고 해군기지에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했는데, 거절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그냥 들어가겠다, 하고 펜스를 절단하고 들어간 것이에요. 이 사건으로 2년 형을 받고 수감됐다가 1년 9개월 만에 가석방됐습니다."


"해군기지, 평화의 시설로 전환해야"
 

해상시위 2018년 10월 제주 강정 앞바다에서 평화운동가들이 해군기지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개척자들

 
요즘 강정은 어떤 모습일까. 해군기지는 완공돼 군함들이 드나들고, 마을은 조용해 보인다. 인적도 드물다. 기지 진입로는 널찍한 아스팔트 길이 시원스레 깔려 있다. 한때 타올랐던 투쟁의 열기는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강정에는 해군기지를 반대하고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살아 있다. 매일 아침 7시에 사람들이 모여 해군기지 앞에서 100배 절을 하고, 11시엔 강정 도로변에서 천막 미사가 열린다. 또 12시가 되면 기지 정문 앞에서 인간 띠 잇기 행사가 벌어진다. 모여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인도 눈에 띈다.

해군기지가 완공된 상황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하는 이같은 행사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감옥에 있으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해군기지는 왜 이렇게 지어지는 것일까,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저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됐어요.

해군기지가 들어온 것은 필요해서다, 이 해군기지로 인해 젊은이들이 이곳 강정에 와서 반전 평화의 사상을 더 발전시키고, 세계 곳곳의 갈등과 분쟁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평화운동가를 양성하라는 게 하늘의 뜻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길 떠나지 않고 남아 있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지요.

이제 해군기지 반대운동은 2라운드로 들어갔습니다. 해군기지가 완성된 2016년 5월에 많은 활동가가 떠나고 마을주민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됐습니다만, 저희는 다음 단계의 운동을 시작한 것이지요. 이 해군기지를 평화의 시설로 전환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화교육을 하고, 국제 평화기구나 단체들을 유치해 강정을 평화의 도시로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요나스 웨일’호 2023년 6월 1일 송강호 선장을 비롯한 5명이 무동력 요트 요나스 웨일에 승선, 107일간에 걸쳐 제주∼오키나와∼대만을 거쳐 돌아오는 5000여 ㎞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 개척자들

 
평화운동가 송강호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공평해(共平海) 프로젝트다. 동아시아의 바다를 전쟁도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공존과 평화의 바다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무동력 요트 '요나스 웨일' 호를 타고 제주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을 돌아오는 대항해를 말한다. 어떻게 이런 대담한 구상을 하게 됐을까.

"제가 이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선포된 지 8년째 되던 2013년 1월이었어요. 오키나와를 가보면 많은 섬에 군사기지가 들어서 있고 또 확장되고 있습니다. 대만도 최근 위험에 놓여 있어요. 지금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 등지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데, 만약에 미중이 전쟁을 벌인다면 제주는 반드시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주나 오키나와의 군사기지를 없애는 일을 하자는 취지에서 '평화의 섬 연대'라는 걸 제안한 것이지요.

이후 2014년 제주를 시작으로, 오키나와, 대만에서 평화의 섬 연대에 동의하는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미야코지마에서 모였는데, 그곳에 미사일 기지가 들어와 마을주민들이 굉장히 반대하고 있어요. 오키나와에는 작은 섬이 많은데 주민들이 다들 외롭게 군사기지 반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런 섬들을 다니면서 응원하자는 취지로 공평해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입니다."

 

오키나와 방문 공평해 프로젝트 과정에서 오키나와에 도착, 헤노코에서 현지 활동가들과 함께 ‘전쟁과 군대 없는 섬들의 연대’를 만들자는 대화를 하고 있다. ⓒ 개척자들

 
공평해 프로젝트는 지난해 6월 1일 '요나스 웨일' 호가 강정항을 출발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졌다.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무동력 요트를 타고 107일간 5100㎞의 바다를 돌아오는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송강호 선장을 비롯한 5명의 대원은 이 여정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을까.

"6월 1일 출항해서 9월 15일까지 항해를 했는데, 그 사이에 태풍이 5개가 지나가는 바람에 시간이 좀 지연되고 항해가 위험하기도 했죠. 먼저 오키나와 쪽으로 항해를 해서 코시키지마 다네가시마 야쿠시마 이마미오시마 등 오키나와 주변의 크고 작은 섬을 들렀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아주 많은 분이 반전 평화운동에 나서고 있었어요. 저희와는 이미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환대를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이외의 작은 섬들에선 소수의 사람이 굳은 각오로 투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들 지역의 활동가들 회합에 참여했고 응원의 메시지도 전했는데, 작은 섬들 방문이 저에게는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대만은 군대에 저항하는 활동가는 많지 않고 인권 문제와 환경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특이했던 건 주민들의 전쟁 위기에 관한 관심이 매우 큰 데 비해 이를 받쳐주는 시민사회단체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만 원주민들의 거주지역이 군사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요. 이들 원주민의 땅 찾기 운동과 우리의 평화운동이 함께 결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 대만은 강대국에 의해 평화가 위협당했다는 역사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착취당하고, 군사시설 들어오고, 또 본국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곳이어서 이 지역 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언어장벽을 넘어서 금방 화합이 되더라고요. 이 세 곳의 섬을 잇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이 지역에 군사기지도 없고 군사훈련도 안 하는 평화의 바다, 평화의 섬을 만든다는 희망이 너무 요원해 보이지만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가 바라는 제주의 미래  
 

백지시위 ‘평화의 바다를 위한 섬들의 연대’ 캠프에서 제주 제2공항 백지화를 요구하는 ‘백지시위’를 하고 있다. ⓒ 개척자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이래 제주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돼 왔다. 그러나 그 취지와는 달리 논의는 겉돌고 실제로는 군사기지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부정적 전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송강호 박사가 바라는 제주의 미래상은 어떤 것일까.

"2000년에 제주에서 큰 국제회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회의의 결론은 제주가 미래에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 같은 것이었어요. 요약하면 제주도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제주도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지로서 평화를 위한 각종 회합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고, 제주도민들이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하며, 평화가 제주도의 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반대로 가고 있어요. 해군기지가 들어섰고, 제2공항이 강행되면 군사기지로 전용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또다시 군사주의라는 폭력에 의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 길로 정부가 끌고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여기에 제주도민들이 무기력하게 방관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게 정부와 부딪칠 수 없다는, 4·3의 경험이 남긴 부정적 영향이라고 봅니다. 주민들이 좀 더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4월 19일에 YMCA 아시아본부가 제주도에 들어옵니다. 이런 기구를 많이 유치해야 합니다. 제주도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비자 받기가 수월한 편이잖아요. 그러니까 유엔 산하 기구나 국제기구들을 유치하고, 이와 관련한 국제회의를 제주도에서 개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국제적인 미디어에 제주도가 자주 노출하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2공항을 건설해 환경파괴를 한다는 건 황금알을 낳는 닭을 잡아먹는 우를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4·3 76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여전히 4·3 폄훼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이념대립을 부추기고 대북정책도 강경 일변도라는 지적이 많다. 평화운동가의 눈으로 본 현 시국은 어떤 상황일까.

"무엇보다도 군사적 대응에 있어 우리나라를 굉장히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염려가 매우 큽니다. 응징과 보복이라는 힘의 논리로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겠다는 태도는 자칫하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상대를 응징해서 제압한다고 한들 우리가 받을 피해를 생각하면 끔찍한 것이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흙더미를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그에 대한 이슬람의 보복도 미국을 아주 황폐하게 만들었죠. 지금 북한과의 싸움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응징과 보복으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우리를 공격해 한순간에 100만, 200만을 날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송강호 박사는 요즘 강정에서 평화운동가를 길러내는 일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봄학기(4~6월)와 가을학기(9~11월)에 개강하는 세계평화대학이 그것이다.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동아시아 평화 기행, 세계 분쟁사례 연구, 평화특강 등을 개척자들 동료와 함께 이끌고 있다. 내년 4월에는 공평해 프로젝트 2차 항해를 시작할 예정이다. 전쟁과 군사주의 반대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다는 평화주의자 송강호의 평화를 위한 여정이 순항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평화대학 개교식 해군기지가 들어선 이후 송강호 평화운동가를 비롯한 ‘개척자들’은 강정에서 국내외 젊은이들을 평화운동가로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 개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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