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6 10:49최종 업데이트 24.01.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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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기 군수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 선고와 관련, 강제동원 피해자인 김정주, 김계순, 이자순 할머니와 유족들이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 원심을 확정받은 뒤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이정민


25일 한일관계의 뇌관을 건드리는 대법원판결이 또 나왔다. 노태악 대법관이 주심인 대법원 1부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및 유족 41명이 전범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제기한 3건의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해자 1인당 8000만 원에서 1억 원씩의 배상을 선고했다.

피해자들이 1944년부터 이듬해까지 강제노역한 도야마시는 일본 서해안에 있다. 북위 36도 69분인 이곳은 경북 울진군(36도 90분)과 위도가 비슷하다. 도야마시 옆인 노토반도는 신년 첫날에 규모 7.6 강진이 발생한 곳이다.


후지코시 도야마공장은 악명 높은 강제징용 현장 중 하나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 끌려갔다고 신고한 116명의 출생 연도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집중돼 있다. 1944년 기준으로 주로 12세에서 15세 소녀들이 이곳에 끌려갔던 것이다.

피해자들은 연령과 어울리지 않는 중노동을 강요받았다. 2023년 4월 19일 별세한 나화자 할머니는 하루 12시간씩 선반 작업을 했다. 2022년 2월 21일 별세한 안희수 할머니는 자기 몸의 두 배 이상인 선반기계도 다루고, 작동 중인 기계에 깔때기를 대고 입으로 기름을 빨아올리기도 했다.

소녀 안희수에게 배급된 식사는 공깃밥 4분의 1과 단무지와 된장국(아침) 그리고 빵 한 조각(점심)이었다. 이것이 실질적인 봉급이었다. 이런 대우를 받은 피해자들이 80년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 '고작' 8000만 원에서 1억 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내각 관방장관은 이번 판결에 대해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고, 외무성은 주일한국대사관의 김장현 정무공사를 불러 항의했다.

일본은 박정희·전두환 정부와 더불어 윤석열 정부에 호감을 표시한다. 이 분야에서 윤 정권은 박 정권과 1위를 다투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이 요즘 들어 윤석열 정부를 상대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작년 12월 8일 취임한 뒤로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선고가 연달아 나오면서 일본의 항의가 잦아지고 있다.

대법원은 같은 21일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28일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센을 상대로, 이달 11일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선고한 데 이어 25일에 후지코시에 대한 선고를 하게 됐다.

지난 23일에는 손해배상 선고 못지않게 일본이 두려워하는 재판 결과가 나왔다. 패소판결에 따른 강제집행을 저지하고자 히타치조센이 법원에 맡긴 공탁금에 대한 원고의 압류추심명령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 측이 공탁금 압류를 통해 배상금을 받는 첫 사례가 임박하게 됐다. 일본이 한국에 굴복해 억지로라도 배상하는 장면을 목격할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이다. 위와 같은 일련의 재판은 일본을 더 초조하게 만들고 윤 정권에 대해 싫은 소리를 자주 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법부 입장과 충돌하는 윤석열 정부의 입장

위 재판들은 일본을 신경질적이 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식민지배 문제에 관한 윤 정권의 논리를 약화시키는 결과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의 대법원판결과 관련해 많이 거론되는 1965년과 2018년이라는 연도는 윤 정권의 논리적 기반을 금가게 만드는 작용을 하고 있다.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에 기초해 있다. 이런 판결들은 2018년 대법원판결을 문제 해결의 준칙으로 사용한다. 1965년은 부정하고 2018년은 긍정하는 것이 한국 대법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윤 정권은 문제의 준칙을 1965년에서 찾는다. 작년 3월 21일 국무회의 때 윤 대통령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은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발언함으로써 1965년 협정에 의해 한국인 개개인의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측 입장에 동조했다.

이날 모두발언에서 그는 1965년을 3차례 언급하면서 이를 '한일 공동 번영',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등의 긍정적 이미지와 연결시켰다. 반면, 2018년과 관련해서는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사건 판결은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등 경제보복으로 이어졌으며, 우리도 일본을 WTO에 제소하고 우리 화이트리스트에서 일본을 배제하는 등 역사 갈등이 경제 갈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2018년을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시킨 것이다.

이런 대비 방식은 한국 정부가 전범기업 책임을 떠안기로 하는 그달 3월 6일의 외교부 장관 발표 때도 나타났다. 박진 장관이 발표한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에서도 1965년과 2018년이 상호 대비됐다.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되어온 양국 간의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8년 10월과 11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대법원판결 이후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규제가 발표되었습니다. 또한 2019년 8월 우리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를 통보하였습니다. 이어서 코로나19 발생 이후 인적 교류 단절 등으로 경색된 한일관계는 사실상 방치되어 왔습니다."


박진 장관은 윤 대통령보다 한술 더 떠, 2018년 판결의 부정적 결과를 설명하면서 코로나19까지 거론했다. 1965년을 좋아하고 2018년을 싫어하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태도가 윤 정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이런 윤 정부의 입장은 1965년을 배척하고 2018년을 준거로 하는 사법부의 입장과 충돌한다. 한국의 정부와 법원이 이 문제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식민지배 문제 해결은 한국 사회 성격과 운명 좌우
 

박진 외교부 장관이 2023년 3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를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작년 3월 6일 발표 당시 윤 정부는 이런 충돌에 대비하는 장치를 만들어뒀다. 일본 기업을 대신해 책임을 떠안는 제3자 변제 방식을 2018년 대법원판결뿐 아니라 "현재 계류 중인 강제징용 관련 여타 소송"에도 확대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장치가 있다고 충돌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3·6 발표가 대법원판결에 적용되려면, 3·6 발표와 대법원판결의 기본 전제가 서로 같거나 비슷하기라도 해야 한다. 양자의 본질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를 다른 하나에 적용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1965년 협정은 일제 식민지배가 나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반면, 2018년 대법원판결은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잘못을 범했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1965년과 2018년이 이처럼 서로 융화되기 힘들다는 점은, 1965년을 지지하는 윤 정부와 2018년을 지지하는 대법원이 이 문제에 관한 한 상호 대립적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위 국무회의 때 윤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의 합의와 2018년 대법원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으로 제3자 변제안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섞이기 힘든 두 가지를 절충해 대안을 만든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일본의 호의적 반응과 기시다 총리의 파안대소에서 여실히 나타나듯이, 제3자 변제안은 2018년과는 거리가 멀고 1965년과만 가까울 뿐이다.

식민지배 문제 해결은 한국 사회의 성격과 운명을 좌우한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서 사법부와 행정부가 정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 윤 정부의 입장이 잘못됐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것이 잘못됐음을 확인해 줄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정부가 위헌·위법인지 대법원이 위헌·위법인지를 확인해줄 공권력이 사실상 부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윤 정부의 우격다짐으로도 해소될 수 없다. 작년 7월 26일에 외교부가 의견서를 보내 대법원을 압박한 일이 있지만, 최근 두 달간의 판결들에서 잘 나타났듯이 대법원은 2018년 판례를 따르고 있다. 이 상황을 입법부가 어찌하기도 힘들다. 지금 상황을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조치가 국회에서 나온다 해도,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나라의 앞길을 좌우하는 중대 사안을 입법·행정·사법 3부 어느 쪽도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은 국민이 직접 의사표시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단계로 한국 상황이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민의 뜻을 직접 묻지 않고도 국가 운영을 가능케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동요할 가능성에도 주목하게 된다. 식민지배 문제를 올바로 처리하지 못한 윤 정권의 대처법이 한일관계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에까지 중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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