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2 17:31최종 업데이트 24.01.1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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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 등이 지난해 12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 선고가 마친 후 기뻐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 3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조센을 상대로 각각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의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 연합뉴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전범기업 자산으로부터 배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본 기업의 돈으로 피해자가 배상을 받는, 일제 식민지배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난달 28일 전범기업인 히타치조센을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 측이 이달 10일 히타치의 법원 공탁금에 압류추심신청을 한 사실이 11일 보도됐다. 법원이 신청을 받아들이게 되면, 전범기업 자산으로 배상을 받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전범기업에 직접 청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3월 6일 발표한 제3자 변제안이다. 당시 박진 외교부장관은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제3자 자격으로 피해자 및 유족에게 승소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향후 확정될 사건에도 이 방침을 적용하겠다고 천명했다. "현재 계류 중인 강제징용 관련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 동 판결금 및 지연이자 역시 원고분들에게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이처럼 전범기업에 대한 직접 청구를 차단하고자 했지만, 지난달 28일 승소한 피해자 측은 히타치조센의 법원 공탁금을 압류해 직접 배상을 관철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배상금 아닌 강제집행 막기 위한 공탁금

이번 사건 피해자인 이아무개씨는 1944년에 히타치조센의 오사카 조선소로 끌려가 휴일도 없이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봉급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듬해에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 갈 때는 끌려가고 올 때는 숨어서 왔던 것이다.

2012년에 일본제철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나왔다. 그 뒤인 2014년 11월에 이아무개씨는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 모두 승소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둔 것은 2019년 1월 11일이다.

2012년의 대법원판결은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하라며 소송을 돌려보내는 파기환송판결이었다. 이로 인해 사건이 하급심으로 되돌아갔다가 대법원에 재상고된 뒤에 나온 것이 2018년 10월 30일의 대법원 확정판결이다. 다음달인 11월 29일에는 양금덕 할머니 등이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강제징용에 관한 승소 판결을 대법원에서 받았다. 히타치조센 피해자인 이씨가 서울고법에서 승소한 것은 그 직후였다.

이씨가 청구한 금액은 1억 2천만 원 상당이었다. 서울고법은 5천만 원과 지연손해금 지급이 적정하다며 일부승소판결을 내렸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재판부는 "이씨가 강제징용돼 귀국하기까지 약 1년 정도 소요된 점" 등을 그런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법리상의 이유가 어떠하든, 2019년에 95세나 된 피해자가 해방 74년 뒤에 받는 배상금치고는 너무 적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2심 판결이 나온 2019년 1월 11일, 히타치조센은 발뺌한다는 인상을 주는 짤막한 성명을 회사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이씨가 자기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성명이었다. 성명 전문은 이렇다.

"오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당사에서 일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1명이 한국에서 당사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해, 서울고등재판소에서 당사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이 언도됐습니다. 이 판결은 일한청구권협정과 이에 관한 일본 정부의 견해 및 당사의 주장에 반하는 판결이라서 유감스럽습니다. 정부와도 연락을 취하면서 상고를 포함해 적절한 대응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정면 대응을 선포한 히타치조센이 한국 법원에 6천만 원을 공탁했다. 2심에서 패소한 그달에 있었던 일이다.

이 공탁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히타치조센의 한국 자산에 강제집행을 신청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일종의 보증금 납부였다. 그달 11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전 징용공 소송의 원고측, 히타치조센의 공탁금 압류 신청'이란 기사에 따르면, 그것이 강제집행을 막기 위한 공탁이었다는 점은 다른 데가 아닌 히타치조센에서 나온 말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이 회사 관계자 등의 발언을 근거로 이렇게 보도했다.

"히타치조센 등에 의하면, 이 회사는 2심에서 패소한 직후인 2019년 1월, 한국 내 자산의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6000만 원(약 660만 엔)을 재판소에 공탁했다."
  
2018년 10월 31일의 대법원판결 얼마 뒤인 2019년 1월 3일이었다. 이날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포스코와 일본제철의 합작사인 포스코 부산물자원화법인(PNR)의 주식 중에서 일본제철의 지분에 대한 압류신청을 승인했다. 패소한 전범기업이 강제집행 위기에 처하는 이런 분위기가 히타치조센이 공탁금을 납부하는 배경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제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사전 예방적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안심할 수 없다
 

지난해 7월 4일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공탁 절차를 개시한 가운데, 외교부 앞에서 ‘대일굴욕외교, 역사정의-피해자 인권 짓밟은 윤석열 정부 규탄 - 공탁 철회 긴급기자회견’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히타치조센은 한때 일본 조선업계를 이끌던 유력 기업 중 하나였다. 이만한 기업이 5천만 원에 대한 강제집행이 두려워 그런 조치를 취할 이유는 없다. 배후에는 강제징용 범죄를 시인하지 않으려는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들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일제 패망 6개월 뒤인 1946년 2월에 일본 내무성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아 가지 못하게 사전 단속하라는 지시를 각급 경찰에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 일본제철은 '징용공들이 임금을 청구하면 경찰에 연락하고 절대 굴복하지 말라'는 지시를 각 제철소에 내려보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은 일본 자산이 강제징용 손해배상에 충당되는 것을 굴욕이나 패배로 인식한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런 굴욕이나 패배를 방지할 목적으로 히타치조센이 강제징용을 막아달라며 보증금 6천만 원을 선제적으로 공탁했다고 볼 수 있다.

히타치조센은 공탁 5개월 뒤인 2019년 6월에는 서울지점을 폐쇄했다. 이를 두고 법원 강제집행을 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히타치조센은 당연히 부정했다. 경영 합리화 차원의 일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설마 5천만 원 주지 않으려고 서울지점까지 폐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한국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과거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에게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닐 수도 있다. 히타치조센의 지점 폐쇄가 강제집행을 피할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드는 이유다. 

이달 10일의 공탁금 압류로 일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 피해자 측의 신청을 받아들인다 해도, 히타치조센이 공탁금 회수청구권을 행사해 6천만 원을 되찾아갈 가능성, 또한 윤석열 정권이 이런 과정에 개입해 전범기업을 편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국민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끝까지 안심할 수 없는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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