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1 19:51최종 업데이트 23.11.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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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전남 장흥군 장흥읍 충렬리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제막식. ⓒ 마동욱

 
'동학장군' 하면 흔히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리지만, 그 호칭에 어울리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당시의 일본 <국민신문>에 실린 이소사(李召史) 역시 그런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라도 장흥 출신인 그 역시 항일전투 현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영웅적으로 싸워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소사를 이두문자 독법에 맞춰 이조이로 표기한 글들도 있지만, 그렇게 읽으면 이소사가 실명으로 잘못 인식될 수도 있다. 소사는 이름이 아니라 기혼 여성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그러므로 이조이가 아닌 이소사로 읽어야 의미가 정확히 전달된다.


이소사에 관한 당시의 일본 기사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운영하는 '동학농민혁명사료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실린 1895년 3월 5일 자 <국민신문> 기사는 잔다르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동학교도를 지칭하는 동당(東黨)이란 표현을 써가며 "동당에 여장부가 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그에 관해 이렇게 소개한다.

"방년 22세이며 용모는 성(城)을 기울게 할 만한 미색이라고 전해지고, 이소사라고 불린다."

이에 따르면, 이소사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 무렵에 태어났다. 그를 접촉한 일본군은 그의 외모에 주목했던 모양이다. 나라를 기울게 할 미인이라는 경국지색과 비슷한 의미인 '성을 기울게 할 만한 미색'이라는 표현이 기사에 사용됐다. 경성지색의 보유자로 비쳤던 것이다.

22세 이씨라는 것과 기혼 여성이라는 것에 더해, 신원을 알려주는 또 다른 단서가 기사 중반부에 있다. "예전에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옛 제기를 주었다고 해서 동학도들이 모두 존귀히 여겨 신녀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장흥의 동학교도들이 그를 신녀로 받들었다고 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 지역 교도들이 모두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가 영험한 신녀로 인식됐음을 의미한다. 무녀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동학에 입교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생과 더불어 무녀가 지방의 공공 의료를 담당했다. 역병이 발생하면 국가는 이들을 동원해 대처했기 때문에 무녀들이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용이했다. 22세의 기혼 무녀이자 동학교도인 이소사가 장흥 교인들의 지지를 받은 데는 이런 시스템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말 위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동학혁명을 이끈 여성 이소사 ⓒ 권경원

 
1894년 상반기에 봉기한 동학군은 처음에는 '반(反)봉건'을 기치로 내걸고 조선 정부군과 싸웠다. 동학군은 이 싸움에서 호남 곡창지대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점령하는 일대 성과를 거뒀다. 농업시대인 이 당시에는 호남이 최대 산업지대였다. 이런 전주성의 지배권이 걸린 싸움이었으므로 동학군은 물론이고 조선 정부군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싸움에서 동학군이 승리했다. 조선 정부군은 동학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이 사건을 대체로 일본군 파병이나 상륙 혹은 개입 정도로 표현하지만, 조선왕조가 명확히 거부하는데도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한양 경복궁까지 점령했으니 이를 침략으로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 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없었다면, 현대 한국인들은 분명히 이 사건을 일본의 침략으로 기억하게 됐을 것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고종의 파병 요청을 받고 상륙한 청나라군과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우위를 장악했다. 그렇게 해서 청군의 패색이 짙어진 뒤에는 '청나라군 대 일본군' 구도가 아닌 '동학군 대 일본군' 구도가 상황을 이끌어갔다.

조선 정부와 청나라군을 연달아 제압한 일본군은 이 무렵에는 조선 관군을 끌어들여 동학군과의 한판 승부에 나섰다. 그래서 1894년 하반기의 동학군은 반봉건보다는 반외세에 주력하는 항일군대가 되어 있었다. 제국주의 확산에 맞서는 투쟁의 선봉에 있었던 것이다.

이소사가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시기였다. 그는 장흥 교인들의 신망을 바탕으로 전투 현장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국민신문> 기사는 장흥부 동학군이 일본군에 패하고 도시가 불타는 최후의 순간에 "그가 말 위에서 지휘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라고 보도했다. 일본군이 불길 속의 장흥부를 휘저으며 동학군을 살상할 때 그가 말 위에서 항전을 지휘하는 모습이 현장의 군인들에게 인상적으로 각인됐던 모양이다.

전투에서 패한 뒤에 그는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 민병대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호남과 호서의 진압 책임자 중 하나로 임명된 양호우선봉장(兩湖右先鋒將) 이두황이 남긴 <양호우선봉일기>의 을미년 1월 1일 자(1895년 1월 26일 자) 기록에 따르면, 이소사를 붙잡은 것은 민간인들이었다. 동학군의 개혁 요구에 맞서 지주들이 결성한 민병대도 일본군 편을 들었으므로, 이런 민병대에 동원된 주민들이 그를 체포해 관군에 인계한 것으로 보인다.

포로가 된 이소사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위 날짜 일기에 따르면, 문초를 받을 때 곤장도 함께 맞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살이 썩어 문드러질 정도가 됐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그는 일본군에 인계됐다. 일본군의 신병인도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이 아닌 일본에 맞선 의병이므로, 일본군이 자신들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 뒤 이소사가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일본군영에서 석방됐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최후까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2021년 5월 11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열린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선봉일기>의 1월 3일 자 기록에는 그가 체포된 뒤에도 호탕하게 웃으며 이상한 주문을 외우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군이 작성한 토벌 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에도 그가 미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고문으로 육신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의연하게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 그렇게 비쳤으리라 볼 수 있다. 죽는 순간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유관순처럼 이소사도 자기 나름의 주문을 외웠던 것이다.

이소사는 일본군의 점령으로 조선정부가 독립성을 빼앗긴 상태에서 동학군 부대를 이끌고 최후까지 일본군에 항전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끝까지 말 위에서 항전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포로가 돼 모진 고문을 받고 육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일본군에 인계됐다.

이 정도의 항일투쟁을 했다면,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독립유공자 1만 7848명의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 그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이에 관한 국가보훈부의 입장은 '1895년 을미사변 때 궐기한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1894년 하반기부터 1895년 연초까지 활동한 동학군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구분법이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지만, 보훈부는 합리적 사유 없이 동학군을 유공자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다.

동학의 슬로건이 반봉건·반외세였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국사나 한국사 교과서에서 강조됐다. 이 슬로건에 나오는 반외세의 '외세'는 일본이다. 동학은 제1차 거병 때는 반봉건을 위해 싸우고 제2차 거병 때는 반외세를 위해 싸웠다. 반외세 투쟁 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힘을 소진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동학군 참여자들을 항일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을 합리적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소사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나이, 직업, 종교와 더불어 항일투쟁이 비교적 소상히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그의 항일투쟁으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을지문덕은 이소사만큼도 인적 사항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인들이 그의 업적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삼국사기> 설씨 열전의 주인공인 설씨녀는 설씨라는 것과 여성이라는 것과 율리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지만, 약혼자 가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에 등재됐다. 이름 없이 그냥 설씨녀로 소개됐지만, 의리의 표상으로 후대에 기억되는 데에 별문제가 없다.

독립유공자를 지정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본인과 후손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두고두고 기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름 없이 그냥 이소사로만 기억돼도 장흥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억하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다. '동학장군 이소사' 같은 인물을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의 퍼즐을 완성시키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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