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7 11:05최종 업데이트 23.10.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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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26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질의를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뒤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논쟁을 멈추고 오직 민생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6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박 장관은 "이념논쟁이라는 것이 민생하고 꼭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발언했다. 멈출 의사가 없음을 표시한 셈이다.

반공 및 친일문제와 관련된 역대 보수정권의 이념은 우리 사회의 부와 경제적 가치가 그런 이념을 추종하는 쪽으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는 일반 대중의 민생을 각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념전쟁과 민생을 쉽게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윤 정권이 전개하는 이념전쟁·역사전쟁이 대중의 민생을 팍팍하게 만들기 쉽다는 점이다.


박민식 장관은 26일 국회에서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역사적 평가는 국민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파인가 아닌가를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이 발언은 지난 7월 6일 자신이 했던 말과 배치된다.

그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그는 "제가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이분은 친일파가 아니에요"라고 단언하면서 "제가 제 직을 걸고 이야기를 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며 친일 판단을 보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그가 종전의 완고한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백선엽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합의를 그가 무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11월 30일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이 보고서는 약칭이 반민족규명법인 위 특별법 제2조 제10호를 근거로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하였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이라는 문장으로 백선엽의 친일행위를 정리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5월 31일이지만, 이 위원회가 백선엽을 친일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발간한 것은 이명박 정부 2년차인 2009년 연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위원회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위원회의 활동이 국민들의 친일청산 열기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청산에 대한 그 같은 열망을 반영해 백선엽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백선엽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 판단이 이처럼 2009년에 이미 내려졌는데도, 14년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 박민식 장관은 역사적 판단에 맡기자고 말하고 있다. 이미 형성된 국민들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이승만과 더불어 백선엽을 띄우는 역사전쟁

박민식 장관이 이념전쟁을 멈출 의사가 없다는 점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하면서도 반민족규명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 데서도 나타난다. 26일 국회에서 강성희 진보당 의원이 백선엽에 관해 질의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시죠?"라고 묻자 그는 "특별법 자체는 인정하죠"라고 짤막이 답했다.

뒤이어 "그 법에 나와 있는 대로 행동하실 거죠?"라는 강성희 의원의 확인성 질문이 나왔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법적 근거인 반민족규명법을 존중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장관은 "법은 인정하지만"이라고 한 뒤 "법의 내용과 법이 통과됐다는 사실은 다른 거죠"라며 법률이 사실을 반드시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런 뒤 "저는 그 법에 대해서 흠결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라며 "앞으로 국민들의 의견을 많이 수렴해서 더 완벽하게 보완을 해갈 과제가 우리 국회의원님들한테 있다고 저는 봅니다"라고 말했다. 반민족규명법의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백선엽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뿐 아니라 대통령 소속 기구가 발간한 위 진상규명보고서에도 친일파로 규정돼 있다. 그의 이름이 4389명이 수록된 <친일인명사전>에만 들어 있고 1006명이 수록된 진상규명보고서에는 들어 있지 않다면, 윤 정권이 <친일인명사전> 공격에 주력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이름이 두 군데 다 들어 있기에, 일단은 국가에서 만든 진상규명보고서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쪽으로 박민식 장관이 방향을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반민족규명법에 흠결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백선엽이 이 법률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상규명위원회가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법적 근거인 이 법 제2조 제10호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했다.

백선엽은 만주국군에서 중위 계급장까지 달았다. 그래서 제2조 제10호를 피해 나갈 수 없다. 박 장관이 개정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이 조항이 그를 고민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이승만과 더불어 백선엽을 띄우는 역사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그로서는 국가기관이 '백선엽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제10호에 불편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백선엽 중위'를 구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제10호의 "소위 이상"을 '대위 이상'이나 '소좌 이상' 정도로 개정하는 게 급선무일 수도 있다.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가의 추모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독립군 일병'들을 찾아내는 일에 집중해야 마땅하다. 보훈부 장관이 '독립군 일병'이 아닌 '친일파 중위' 구하기에 몰두하는 것은 본분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반민족규명법을 개정한다 해도 <친일인명사전> 속의 백선엽 이름은 어찌할 수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아는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를 기준으로 친일파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윤 정권이 어떻게든 반민족규명법을 개정하면, 그다음에는 <친일인명사전>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여소야대 국면이므로 윤 정권의 반민족규명법 개정 운운은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것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법을 바꿔 백선엽 중위를 친일의 굴레로부터 구해낼 길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이 문제를 꺼낸 것은 윤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극우 진영을 다잡고 이들이 총선에서 분발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념전쟁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극우세력의 동요를 막고 이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효과도 박민식 장관의 발언에 담겼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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