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2 21:27최종 업데이트 23.05.0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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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띄우기 위한 국가보훈처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번에는 박민식 보훈처장이 미국까지 가서 한국으로 메시지를 띄웠다. 미국 시각 4월 28일 워싱턴에서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 좌담회를 열고 미국 학자들의 입을 빌려 '이승만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이끌어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초청된 학자들은 그렉 브래진스키 조지워싱턴대학 교수, 데이비드 필즈 위스콘신대학 동아시아센터 부소장, 윌리엄 스톡 조지아대학 석좌교수다. 이들은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겨냥해 "상당수는 당시 상황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거나 역사적 진실의 일부분만 담고 있는 왜곡"이라며 이승만 재조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한국인들이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보다는 이 미국인들이 부실한 관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국제연맹이 한국 통치하게 해달라던 이승만

윌리엄 스톡 교수는 전혀 엉뚱한 사례를 근거로 이승만을 높이 평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라며 "이는 일본 통치의 영구화가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조기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스톡 교수가 언급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는 3·1운동의 기운이 무르익던 시점이다. 제1차 대전 종결(1918.11.11) 2개월 뒤인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사망하고, 뒤이어 2·8독립선언이 발표되고, 천도교와 기독교가 3·1운동을 함께 거행하기로 합의(2.24)하는 일들이 있었을 때였다.

이승만은 2월 25일 위임통치 청원서를 작성했다. 일본 대신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서였다. 그는 이것을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독립운동가가 이런 청원서를 보냈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가 그 청원서에 대해 했던 말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신채호는 "미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라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소!"라고 분노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이처럼 분노케 했던 것은 위임통치 청원서의 한 구절이다.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원하는 바입니다.
 
'완전한 독립의 보장'은 미래의 일이다. 청원의 핵심은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통치였다. 주인을 바꿔달라는 이런 청원이 한국 독립과 무관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청원은 "연합국 열강"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 속에는 일본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그 일본과 가까웠다. 이승만의 청원은 일본과 그 우방국들에게 '주인을 일본에서 국제연맹으로 바꿔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승전국인 상황에서 그런 청원을 보냈다는 것은 이승만이 한국의 운명을 진정으로 염려했는가를 의심케 만든다. 청원에서 그런 염려가 느껴졌다면, 신채호가 이완용·송병준까지 거론하면서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톡 교수의 주장은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청원서에 담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라는 문구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친일파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 필즈 부소장은 "이 전 대통령이 친일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질문을 한 사람은 박민식 처장이다. 이것은 잘못된 물음이었다. 이승만은 친일청산을 소극적으로 한 게 아니라 아예 방해한 사람이다. 친일청산을 추진하는 국회 반민특위 사무실을 1949년 6월 6일 습격한 경찰 병력은 이승만의 지휘하에 있었다.

잘못된 질문을 받은 필즈 부소장에게서도 잘못된 대답이 나왔다. 필즈는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하지 않은 것은 한국의 발전을 위한 실용적 결정이었다고 평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냐'는 것이었고, 대답은 '그렇다'였다"라며 "이념의 문제가 아닌 실용적 결정이었다"라고 답했다.

윌리엄 스톡 교수도 거들었다. 그는 "국가를 이전에 운영해본 사람들의 능력과 경험을 배제하기는 힘들었다"라며 친일파들이 국가 경영에 필요했다는 논지를 제시했다. 그는 프랑스 드골 정권이 나치 협력자들을 기용한 일을 거론하면서 "프랑스는 나치 점령을 4년 동안만 받았는데도 그렇게 됐다"라며 "한국은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더 오래 지배를 받았으므로 친일파들의 능력을 배제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를 경이롭게 만든 일이 있었다. 해방 직후의 한국에서 자율적 정치조직이 신속히 퍼져나간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조직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불과 수 주 만에 농촌을 지배"했다고 평했다.

당시는 농업사회였으므로 농촌 지배는 곧 전국 지배였다. 불과 몇 주 만에 전국 행정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친일파가 아닌 반대 진영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에서 커밍스는 "미국은 기존의, 성장할 수 있는 지방의 정치조직들을 조직적으로 말소시키고자 하였다"라고 서술한다. 미국이 조직적으로 말소시켜야 할 만큼의 정치적 역량이 한국 내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스톡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훈련받은 친일파들을 배제하면 대한민국 운영이 힘들었으리라는 시각을 드러냈다. 한국은 물론이고 어느 민족이나 다 갖고 있는 자율적 정치능력이 해방 직후의 한국에 별로 없었다고 본 듯하다. 한국을 낮춰 보는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진 이런 학자들로부터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국가보훈처의 식견을 의심케 만든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29일(현지시간)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미국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을 방문해 서재필 재단, 이승만 기념사업회, 재향군인회 등 주요 내빈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3.4.30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진영에서 공식 추방된 사람

보훈처의 30일 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민식 처장은 좌담회 다음날인 29일에는 서재필의 독립운동 흔적이 있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현 명칭은 Play&Players Theatre)을 방문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4~16일에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미국 사회에 알린 역사적 현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김승태 전 독립기념관 자료과장이 쓴 <서재필: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 개혁의 선구자>는 3·1운동 직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국내 운동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동포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한인연합대회를 여는 것"이었다며 서재필의 제1차 한인회의 개최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이 대회는 짧은 준비기간과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사회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라고 하고 나서 "한인 대표들 가운데는 이승만·정한경·민찬호·윤병구 등이 있었고, 학생들 가운데는 임병직·김현철·장기영·조병옥·유일한 등이 참석했다"고 서술한다. 서재필이 이승만 등의 협력을 받아 주최한 대회였던 것이다.

보훈처장이 이곳을 방문한 일차적 목적이 서재필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보훈처 보도자료를 봐도 서재필보다 이승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보도자료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가 극장 앞에서 한인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라며 이승만을 서재필보다 앞에 뒀다. 윤석열 정권 들어 보훈처가 이승만 재조명에 열의를 쏟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 처장 방문의 일차적 목적은 이승만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재필이 주최한 제1차 한인회의는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승만이 이 회의에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이승만 재조명의 자료로 활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대회 2개월 전에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발송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이승만은 하자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그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가 1925년에 탄핵했다. 한국이 국제연맹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승만은 임시대통령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도리어 독립운동을 방해하다가 탄핵됐다.

헌법재판소 기능을 수행한 임시정부 이승만심판위원회는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어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애(妨礙)하였고" 등의 표현을 써가며 이승만을 내쫓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립운동진영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된 사람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의 탄핵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정부는 그런 이승만에게 1등급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이 일은 1949년에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일 때였다. 독립운동진영에서 쫓겨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건국훈장 셀프 수여가 1925년 탄핵을 사면하지는 못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앞세워 이승만 띄우기에 과도한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다. 보훈처장이 미국에 가서 좌담회까지 열고, 왜곡된 역사지식을 한국으로 송출하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방해한 일 때문에 1925년에 쫓겨나고, 장기독재·부정선거·민간인 학살 등을 저지른 일 때문에 1960년에 또다시 쫓겨났다. 그런 이승만을 띄우는 것은 이승만 시대의 정치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로밖에 볼 수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로 한국인들을 데려가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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