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8 20:32최종 업데이트 24.04.0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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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고추. 2023.11.22. ⓒ 연합뉴스

 
총선에서 특정 농산물이 이슈가 되는 일은 10·26 사태 1년 전인 1978년에도 있었다. 김장철인 12월 12일에 제10대 총선이 치러진 이 해에는 선거운동기간에 고추가 이슈가 됐다.

총선을 석 달 앞둔 그해 9월 20일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 '고추·마늘·양파'는 "당국의 추계에 의하면 고추의 생산은 30%쯤 준 것으로 잡고 있다"라며 "산지에서 작년에 1근에 3백 원 하던 고추가 지난 8월에 1천 2백 원으로 뛰어오르고 9월 초의 추석 직전엔 2천 6백 원까지" 올랐다고 보도했다. 고추값이 전년에 비해 근 10배 가까이 올랐던 것이다.


고추가 귀해지자, '고추는 몸에 해롭다'는 논리가 퍼지기도 했다. 9월 26일자 <경향신문> '고추는 꼭 많이 먹어야 하나'는 윤서석 중앙대 사대 학장, 성낙응 이화여대 교수, 한정혜 요리연구가 등의 말을 근거로 "우리나라는 본래 고추를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으며", "고추가루를 많이 쓰면 자극이 강해 다른 양념이나 본래 재료의 맛을 죽이고 오히려 음식 맛을 버려", "고추에는 캡사이신이라는 매운 성분이 많아 이것이 인체에 해를 끼친다" 등등의 설명을 했다.

11월 17일자 <조선일보>에 '고추 유해론'을 기고한 이상일 성균관대 교수는 "고추가 흉작이라서 개국 이래 처음으로 수입고추를 먹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라고 한 뒤 "(신문)지상에 고추 유해론이 심심찮게 실리는 것을 보면 괜히 밉살스러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쌀이 모자라면 쌀밥 유해론이 나오고"라며 불편함을 토로했다.

선거의 화두가 된 '고추'

박정희는 그해 7월 6일 제9대 대선에서 다섯 번째 대선 승리에 성공했다. 득표율은 100%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 중 2577명(1표는 무효)의 지지를 받아 임기 6년을 새로 보장받았다. 그런 직후에 대선과 총선의 중간에 불어닥친 고추 파동으로 인해 그는 난관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드러냈다. 9월 15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다.

"박정희 대통령은 14일 청와대에서 남덕우 부총리, 장덕진 농수산부장관과 민병권 교통부장관 등으로부터 농수산물 가격 안정과 추석 귀성객 수송대책에 관한 보고를 듣고 최근 농협에서 수입고추를 판매할 때 주부들이 많이 모여 혼잡을 빚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관계당국은 농수산물 대량 계약재배와 비축 물량의 확보로 대처하여 물가앙등의 주요인이 되고 있는 농수산물 가격 안정에 과감하고 효율적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임방현 대변인이 발표했다."

고추 가격에 신경을 쓰는 박정희의 모습은 11월 월례 경제동향보고회로도 대중에 공개됐다. 훈장을 받은 새마을지도자들과 함께 곰탕을 먹으며 대화하는 이 자리에서 그는 "고추는 수입해 들여와도 왜 오르지요?"라고 장덕진 농수산부장관에게 질문했다.

장덕진 장관은 "오는 20일까지 서울의 김장용 고추 1천만 근을 확보하고 중소도시에 공급할 고추 5백만 근도 수입 완료하여 공급하면 고추값은 안정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합니다"라고 답했다. 수입해도 값이 오르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수입을 마저 해야 한다'는 불충분한 답변이 나왔지만, 박정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새마을지도자 김종우를 돌아보면서 "참 어려운 일을 해냈군요"라며 화제를 바꾸었다.

고추 파동으로 시중에 고추가 귀해진 가운데, 선거운동 현장에서는 고추가 오히려 풍년이 됐다. 선거운동의 소재로 고추가 풍성하게 언급됐던 것이다.

정부의 소관인 수입 고추의 배급 문제를 공화당 선거대책본부가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선거 엿새 전에 발행된 12월 6일 자 <경향신문> 7면 좌상단에 따르면, 이해원 공화당 선대본 대변인은 "아직까지 김장을 못 담그고 있는 지방 대도시 주부들을 위해 공화당은 고추 배급의 확대 실시를 정부 측에 권고, 촉구하여 서울 등 5개 대도시 이외의 8개 지방도시에도 배급을 실시키로 했으며 앞으로 물량이 확보되는 대로 배급 대상 지역을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1978년 12월 6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수입고추 배급확대 수원·청주등 8개 지방대도시에도'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제1야당인 신민당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의 성명에 따르면, 공화당은 음성적 방법으로도 고추 문제를 활용했다. 공화당 선거운동에 투입된 공무원과 통·반장들이 쥐약 구입 비용과 함께 수입 고추를 들고 유권자들을 은밀히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2월 12일 자 <조선일보> 1면 상중단에 따르면, 성명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공화당이 모든 지역에서 고전하게 되자, ①지난 8일 밤 전국 일원에서 쥐잡기 운동을 벌인 것을 기화로 리(里)·동장을 시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종용하고 3천 원~1만 원까지의 금전을 투입한 쥐약 놓기 작전 ②수입 고추를 공급하면서 동 직원과 통·반장을 시켜 공화당 업적을 찬양하고 기호 1번에 투표하도록 부탁한 고추 작전 ③투표할 의사가 없는 유권자의 투표 통지표를 회수하도록 하는 투표 통지표 작전 등을 감행하고 있다."

상대 당이 고추를 부정선거에 이용한다는 폭로는 선거 사흘 전인 9일 여당에서도 나왔다. 12월 10일 자 <조선일보> 1면 좌상단은 "공화당 선거대책기구의 이해원 대변인은 이날 야당은 사술로 선거 풍토를 흐리게 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 예를 제시했다"라며 공화당이 폭로한 신민당의 부정 사례를 이렇게 열거했다.

"▲술에 만취된 사람이 공화당 후보의 명함을 내보이면서 추태를 부렸다(서울 강서). ▲공화당이 야유회에 초대한 것처럼 해놓고 뒷처리를 하지 않았다(서울 마포·용산). ▲공화당 후보 부인을 사칭하고 김장 고추를 절에 기증한다면서 사기를 했다(이 부분은 현재 당국에서 수사 중이라 함)."

고추 파동은 일선 지역구 후보자들의 논쟁도 낳았다. 성남시·여주군·광주군·이천군으로 구성된 경기도 제4선거구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자기 덕분에 수입 고추가 자기 지역에 배당됐다며 다투는 이른바 '고추 논쟁'을 벌였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대선거구하에서 이 선거구에는 7명이 출마했다. 이 중에서 기호 1번 공화당 정동성, 기호 3번 민주통일당 박종진, 기호 6번 무소속 오세응(현직 의원)이 참여한 논쟁을 11월 29일 자 <동아일보> 좌단은 "품귀로 말썽인 고추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 고추논쟁이 한창"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최근 성남시에 수입 고추가 배정되자 오 의원은 '지난번 예결위 질의 때 행정부의 확약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정 후보는 '정부에 건의한 때문'이라 했고, 박 후보는 농수산부장관에게 낸 질의서와 회답 사본을 벽보로 써붙이기도 했다."

1978년 총선은 박정희 독재체제인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고조되던 시기에 치러졌다. 재야와 야당이 벌이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응도가 높아져 1973년 제9대 총선보다 5.7%포인트 높은 77.1%의 비교적 높은 투표율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고추 파동까지 터졌으니 박 정권 입장에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선거에서 패배한 박정희... '고추 가격'도 원인이었다
 

1978년 12월 13일 자 <동아일보> 1면.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을 앞질렀다는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개표 결과는 총 231석 중에서 유신정우회(유정회)가 77석, 민주공화당이 68석, 신민당이 61석, 민주통일당이 3석, 무소속이 22석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의장 박정희)에서 선출된 유정회 의원들은 박정희의 우군이었으므로, 박 정권이 차지한 의석은 유정회와 공화당을 합쳐 145석이었다.

여권의 의석이 과반을 훨씬 넘기는 했지만, 실질적 패자는 다름 아닌 여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비례대표 의석인 유정희 77석은 집권당이 부전승으로 가져가는 의석이나 다름없었다. 이 의석을 제외한 지역구 154석을 기준으로 하면 공화당의 의석은 과반에 미달했다. 공화당은 득표율에서도 밀렸다.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였다.

1978년 12·12 총선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박 정권은 재야와 야당의 공세에 더욱 많이 노출됐고, 이는 1979년 10월 16일의 부마항쟁과 10월 26일의 박정희 시해 사건에 이어 12월 12일의 전두환 쿠데타로 이어졌다.

고추 파동보다는 민주화운동이 1978년 총선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이 파동 역시 적지 않은 파급력을 남겼다. 박 정권은 악재인 고추 파동을 선거에 역이용하고자 고추를 살포하는 선거부정까지 벌였지만, 민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고추의 매운맛에 박 정권이 당한 셈이다.

박정희는 유신체제하의 종신집권을 꿈꿨다. 하지만, 1978년 총선에서 매운 농산물의 맛을 본 그는 더 이상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이듬해 10월 26일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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