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30 15:51최종 업데이트 24.03.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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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2024년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 긴급 검토 세미나가 열린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 독도 관련 내용이 기술된 일본 교과서가 놓여있다. 재단은 이날 세미나에서 일본 정부 검정을 통과한 2024년 사회과 교과서에 기술된 독도,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등 내용을 기존 교과서와 대비해 분석한 내용을 발표했다. ⓒ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이 갑이고, 한국이 을이었다. 반대로 식민지배를 청산하는 일에서만큼은 한국이 갑이고, 일본이 다소곳해져야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배 청산 문제에서도 갑이 되어 있다. 지금의 일본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슈퍼갑'이 되고자 애쓰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최근 일주일 새에 두 번이나 표출됐다.
 
지난 22일에는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검정 결과가 얼마나 '획기적'인지는 그날 밤의 <산케이신문> 기사 '중학교 교과서 검정, 지유사(自由社)의 교과서도 합격'에서 압축적으로 표출된다.

지유사 교과서, 한국 정부 친일청산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지유사 교과서 집필을 주도한 쪽은 극우적 역사관을 퍼트리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이다. <산케이신문>은 새역모로 약칭되는 이 모임이 내놓은 지유사 교과서가 "지난번 레이와 원년도의 검정에서는 결함이 현저히 많아" 탈락한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렇게 2019년에 탈락했던 지유사 교과서도 이번에 검정을 통과했다. 이것이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 '지유사의 교과서도 합격'이라는 기사 제목에 묻어 있다.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듯이, 지유사의 공민교과서에는 일반적인 역사왜곡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교과서는 한국에서 2005년에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을 겨냥해 "이런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우호"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한국 내의 친일파 재산 환수를 재산권 침해로 규정하고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는 내정간섭 성격의 주문을 담고 있다. '한국의 사과·배상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에서 훨씬 더 나아가 '한국 내의 친일청산에도 개입해야 한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주장이다. 식민지배 문제를 매개로 내정간섭을 하려는 발상까지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가해자의 역사왜곡은 흔히 변명이나 은폐로 나타난다. 이런 식의 역사왜곡을 하면 '을(乙)이 뻔뻔하고 파렴치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유사 교과서의 왜곡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이 슈퍼갑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한 셈이다.
 
"그 돈 도로 받아내자"... 뻔뻔한 요구
 

아오야마 시게하루 참의원 ⓒ wiki commons

 
이것에 못지않게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27일에도 있었다. 지난달 20일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히타치조센에서 받아낸 배상금을 도로 찾아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1944년에 히타치조센 오사카조선소에서 무급 강제노동을 당한 이아무개씨는 70년이 지난 2014년 11월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에서 승리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두 번째 승소 판결을 받은 날은 2019년 1월 11일이다. 이날 법원은 배상금 5천만 원과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전범기업에 명령했다.
 
대법원이 일본제철의 강제징용 손해배상책임을 확정한 날이 2018년 10월 30일이고, 양금덕 할머니 등이 관련된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의 징용 배상책임을 확정한 날이 한 달 뒤인 11월 29일이다.
 
역사적인 판결들이 이처럼 연이어 나온 직후에 히타치조센이 서울고법에서 패소했다. 이 상황에서 히타치조센은 자사의 한국 자산이 강제집행을 당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2018년 10월 30일에 패소한 일본제철이 보유한 포스코 부산물자원화법인(PNF) 지분이 2019년 1월 3일 대구지법 포항지원에 의해 압류됐다. 히타치조센은 일본제철처럼 자산 압류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담보금 6천만 원을 한국 법원에 공탁했다. 한국 내 자산을 강제집행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의 공탁이었다.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됐다. 일본제철처럼 되지 않기 위해 공탁금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제철보다 먼저 배상금을 물어주게 됐다.
 
2심 선고로부터 근 5년이 임박한 작년 12월 28일, 대법원은 히타치조센의 손해배상책임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뒤이어 금년 1월 10일, 이아무개씨의 유족이 문제의 공탁금에 대한 압류추심을 신청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지난달 20일 유족들이 돈을 찾아갔다. 히타치조센이 강제집행을 막고자 공탁한 담보금을 한국 법원이 배상금으로 내어준 것이다. 한국인 피해자가 사법 절차를 통해 식민지배 배상금을 받아낸 최초의 순간이다.
 
이 일은 일본 정부를 화나게 만들었다. 2월 20일 자 일본어판 <로이터통신> '원고의 공탁금 수령, 극히 유감'에 따르면, 이날 내각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내각관방장관은 "일본 기업에 부당하게 불이익을 지우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다"라며 한국 법원을 비판했다.

강제징용 당시의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이 강제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의사가 있었다면, 피해자 측이 6천만 원을 찾아간 것을 두고 '일본 기업에 대한 부당한 불이익'이라고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이 처음부터 임금을 지급할 의사가 없었고 그런 인식이 역대 일본 정부에서 계승됐기 때문에 이 돈의 지급을 안까워하고 분개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국 법원을 상대로 '극히 유감'이라고 밝힌 하야시 관방장관을 만나 '그 돈을 도로 받아내자'고 촉구하는 일이 27일에 있었다. 이런 제안을 한 인물은 이달 3일 현재 국회의원 95명이 가입해 있는 '일본의 존엄과 국익을 지키는 모임(日本の尊厳と国益を護る会, 지키는 모임)'을 이끄는 아오야마 시게하루(青山繁晴) 참의원 의원이다. 28일자 <지지통신> '징용공 공탁금, 한국 정부가 보상을'은 이 만남을 이렇게 보도했다.
 
"자민당 보수파로 구성된 의원연맹 '일본의 존엄과 국익을 지키는 모임'의 아오야마 시게하루 대표가 27일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과 국회에서 만나, 전 징용공 소송에서 패소한 히타치조센의 공탁금이 원고 측에 넘어간 것과 관련해 이 회사의 손실을 한국 정부가 보상하도록 촉구할 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히타치조센이 패소해서 내준 돈을 한국 정부가 보상하도록 만들자고 촉구했다. 한국인 피해자 측에 넘어간 돈을 한국 국민들의 세금에서 되찾아가자는 것이다. 이는 자민당 의원들이 과거의 일은 반성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미안해하지도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문제에서만큼은 을이 되어야 할 자국의 처지를 무시하고 한국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겠다는 의지까지 노출한다.
 
아오야마 의원은 2020년 4월 19일에 쓴 개인 홈페이지 글에서 '지키는 모임'의 3대 주장 중 하나가 "중·한에 의한 국토의 침식을 저지하고 회복한다"라고 소개했다. 이 말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일본령 다케시마가 한국에 의해 침식돼 있으므로 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의원 95명의 모임을 이끌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꿔 인식하고 갑과 을을 뒤바꿔 자리매김하는 자민당 의원들의 태도가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일본 교과서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내정간섭 성격의 주장까지 담고, 일본 의원모임의 대표자가 강제징용 배상금의 환수까지 추진하고 있다. 역사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더욱 공격적이고 더욱 뻔뻔해지는 최근 추세를 반영하는 장면들이다.
 
이런 장면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일본이 역사문제뿐 아니라 그 이외의 사안에 대해서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한일 역사분쟁이 역사문제로 끝나지 않고 한국 주권 문제로 이어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에 매를 드는 일본의 적반하장 태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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