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7 19:22최종 업데이트 24.03.1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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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다. 한민당은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1948년 대통령선거 때 그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준 것도 한민당이다. 김학준 서울대 교수의 기고문인 1985년 2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보호자 없는 한민당, 이승만 손잡아'는 해방 2개월 뒤에 있은 이승만의 귀국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승만은 우선 도오꾜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나흘 밤을 묵으며 맥아더 및 하지와 만난 다음, 10월 16일 맥아더가 내어준 미 군용기 편으로 만 32년 만의 해외망명 생활을 청산하면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그는 만 70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하지가 마련해놓은 숙소인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한민당은 즉각 그의 정치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귀국해서 여장을 풀자마자 한민당은 돈부터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3년 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배신으로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분명히 동맹자 관계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배신한 뒤에도 친일세력에 대한 답례만큼은 톡톡히 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함으로써 친일청산을 무력화시켰다. 이를 통해 친일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게 됐으니, 이승만의 행위는 이완용의 친일에 못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청년, 친일파로 전향하다
 

장덕수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은 한민당 지도자이자 호남 재벌인 인촌 김성수다. 김성수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또 다른 한민당 지도자는 장덕수다.

'이승만 자택' 혹은 '이승만 사저' 하면 서울 대학로 주변의 이화장이 떠오르지만, 이화장은 귀국 2년 뒤인 1947년 10월 18일에 입주한 곳이다. 1945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 짐을 푼 이승만은 8일 뒤 서울 성북구 돈암장으로 이사했다가 1947년 8월 18일 서울 용산구 마포장으로 옮겨갔다. 그랬다가 두 달 뒤 이화장에 들어갔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살도록 도와준 인물이 바로 장덕수다. 1970년 광복절에 발행된 <조선일보> 5면 특집기사는 "돈암장은 한민당 총무였던 장덕수씨가 제자였던 장진영씨를 설득, 이 박사의 거처로 삼았었다"라며 이 집의 규모가 4천여 평이었다고 설명한다. 사랑채만 해도 40미터나 됐다고 한다.

장덕수는 이승만이 고급 저택에 2년간 거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같은 물질적 제공은 친일세력과 이승만의 제휴를 수월케 만들었다. 김성수와 더불어 장덕수도 이승만을 친일파들의 세계로 인도한 핵심 인물이다.

이승만은 그 시절 사람치고는 국제 경험이 많았다. 이 점에서는 장덕수도 뒤지지 않았다. 장덕수는 이승만보다 19년 뒤인 1894년 12월 10일 이승만의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과 서해 바다의 중간쯤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한 장덕수는 그 뒤 해외 곳곳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16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에는 오리건주립대학에 들어가고 1924년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 1929년부터는 런던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런 뒤인 1936년에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이승만이 '이 대통령'보다 '이 박사'로 더 많이 불린 것은 박사가 귀했던 시절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런 시절에 장덕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일본에서도 공부했으니, 국제 감각에서는 이승만에게 뒤질 게 없었다.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장덕수도 한때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한국대표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해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여운형의 신한청년당과 함께한 인물이 당시 25세인 장덕수다.

33세인 여운형은 이를 계기로 청년 지도자로 부각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이 되고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도쿄를 방문하게 됐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한국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벌인 연출이었다. 이때 여운형의 일본어 통역이 되어 동행한 인물이 장덕수다.

그 뒤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 되고 부사장이 되고 임시정부 재무부 재무위원 등이 된 장덕수는 193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뒤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덕수 편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같은 해 12월 미국에서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했다"고 한 다음에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순회강연회에서 황해도 지역 연사로 순회강연 활동을 했다"고 설명한다.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 영입에 주력했다. 민족주의운동을 했던 홍난파는 그해 11월에 친일파로 전향했고, 이광수는 이듬해 11월에 전향했다. 이런 시기에 장덕수는 비교적 일찍 친일로 전향하고 전쟁 중의 시국 강연에 나섰다. 그는 그 시절의 '뉴'친일파였다.

해방 이후 또다시 변신한 장덕수
 

서울 돈암장(성북구 동소문동4가) ⓒ 연합뉴스

 
장덕수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 같은 대표적 친일 기구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청년들을 학병이나 지원병 명의의 강제징병으로 내몰았다. 총독부 기관지인 1944년 7월 20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고문에서는 여타의 친일 논설과 대비되는 그의 글을 접할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이 글에 따르면, 그는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는 것을 "참으로 분한 일"로 표현했다.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그런 감정 표현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고향을 귀축 같은 미·영의 마수에서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이 유학한 나라들을 아귀 같은 존재들로 적대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인 것이 이번 전쟁에 패하면 "영구히 미·영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당시의 한국은 식민지가 아니었던 듯이, '미·영의 식민지가 되지 말자'는 말을 했던 것이다.

장덕수는 기고 및 강연을 통해 어느 정도의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기관지인 <총동원>의 편찬위원으로도 일하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도 일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후생위원으로도 일했으니, 이런 데서도 친일 재산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5권은 "다양한 단체에 참가하여 내선일체와 전쟁협력과 관련된 강연 활동과 기고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말로 그의 다종다양한 친일 활동을 정리한다.

그는 자신의 유학지인 미국과 영국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친일재산을 쌓아갔다. 그랬던 그가 해방이 되자마자 곧바로 미국 편에 가세했다. 그가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이끈 한민당은 한국에 들어오는 미군에 신속히 합세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5년 9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을" 지냈다면서 "11월에는 미군정청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사범교육분과 위원에 선임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미국에 지면 미국 식민지가 된다고 경고했던 그가 해방 직후에 미군정청 위원이 됐던 것이다.

장덕수는 친일세력을 한민당으로 결집시키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을 영입하는 일에 나섰다. 이를 위해 이승만에게 돈암장이라는 고급 주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장덕수는 자신이 꿈꾼 새로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했다. 1947년 12월 2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총에 맞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덕수는 그 세상에 오래 살지 못했지만, 그 세상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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