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밭에서신강협 소장은 평화인권연구소 왓에서는 급여가 없어 생업인 감귤 농사 등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황의봉
제주도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면 가능하지도 않겠냐는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 평화와 인권을 연구하는 시민단체를 주도하고, 현장에서 뛰고 있는 활동가 신강협.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신강협 소장의 고향인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는 천주교 신자가 유달리 많은 곳으로, 그가 자라던 때는 전체 주민의 90%가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성당에서 자라나 고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갔고, 대학 때도 수도원 소속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는 가톨릭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에는 평신도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 서강대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 전공은 농업경제학이었지만 신학의 길로 깊숙이 빠져든 셈이다.
신학석사가 된 그에게 문창우 신부(현 제주교구장)가 유학 가서 신학을 계속하라고 권유했고, 결국 2003년 강우일 주교의 추천서를 들고 필리핀 마닐라의 교황청립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필리핀에서 4년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절대빈곤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신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가 처음 몸담게 된 곳은 천주교 이주사목위원회. 이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총괄했다. 이때 제주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꾸야'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나이 많은 오빠나 형을 의미하는 필리핀 말이다. 외국인과 이주민 보호에 집중하던 그는 인권운동 하는 선배가 만든 평화인권센터에 합류하면서 활동의 폭을 넓히게 된다.
2018년 지금 몸담고 있는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왓'은 제주어로 들판 혹은 밭이라는 뜻으로, 제주도 평화와 인권의 대지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또한 제주에서 평화와 인권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포함돼 있다. 신강협 소장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평화'에서 '인권' 문제로 옮겨갔다. 먼저 제주도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의식이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부터 물었다.
육지와는 다른 경험... 제주 사람들의 열망

▲예멘 난민 인터뷰2018년 6월 예멘 난민사건 당시 제주시 탑동 해변공연장 계단에서 난민과 인터뷰하는 신강협 소장. 신변보호를 위해 난민은 등만 보이고 있다.
신강협
"제주 사람들은 육지와는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평화나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은 편입니다.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육지에서는 이슬람이네, 시아파니, 수니파니 하면서 공포감이 확산할 때였는데 난민들과 함께하고 있던 저를 본 어느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경해도(그래도) 구제할 사람은 구제해사주게, 잘했쪄!' 하셨어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일단은 구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말씀 듣고 제가 힘이 나서 난민 옹호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멘 난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씀드리자면, 당시(2018년) 6월 20일이 세계 난민의 날이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난민을 받지 말라는 청와대 청원이 70만을 돌파하는 등 난민에 대한 혐오도가 크게 올라갔어요. 그러자 난민들 숙박을 받아줬던 여인숙 등 숙박시설에서 이들을 내보내는 겁니다. 육지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천주교의 한 공소(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 마을에 10명을 기거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공소 회장님과 이장님을 설득해서 성사된 겁니다.
이들을 공소에 보내놓고 일주일 후에 가봤더니 동네 사람들과 서로 담배도 나눠 피우고 해요. 또 일주일 후에 가봤더니 주민들과 축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다음 주에는 '밭에 와서 일하지 않을래', '양어장에 일손이 비는 데 와서 일해라' 하는 등 인간관계가 생기는 겁니다.
제주 사람들의 이런 태도의 바탕에는 난민 상태를 이미 경험해 봤던 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저희 집안만 해도 4·3이 터지면서 일본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못 들어오시고 평생 일본에서 사시게 됐고, 고모도 일본에서 산업재해를 당하고 피해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돌아오셨거든요.
제주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너무 많습니다. 일제의 결7호 작전으로 제주도 전체가 요새화됐는가 하면, 4·3 때 엄청난 비극을 겪었고, 6·25 때는 예비검속으로 학살당했어요. 그리고 빨갱이 누명을 쓰거나 연좌제로 고통당한 분들도 많습니다. 1970년대에 빈번했던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 중 다수가 제주 사람이었고요. 평화와 인권에 대한 열망이 높을 수밖에 없는 배경입니다."
불교학과 석사 노동자에게 육계가공업체 배정이라니...

▲제주 시민사회 인사들이 6월15일 제주지역 활동가들에 대한 잇단 압수수색과 체포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신강협 소장이 국가보안법 문제를 거론하며 발언하고 있다.
신강협
요즘 제주도는 때아닌 공안 탄압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진보정당 인사, 농민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이 압수수색 당하고 구속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구시대의 '빨갱이' 논란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는 형국이다. 신강협 소장은 규탄집회에서 발언하는 등 연대투쟁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이른바 '공안사건'이 여전히 등장하는 퇴행 현상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기본적으로 4·3 때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극단적 혐오와 함께 어느 일방 정치세력의 탐욕이 우리 사회의 인권보장체제 자체를 무력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주의 상황을 보면서 이러한 반인권적 법적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사상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공론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 75주년 4·3 기념일을 전후해서 벌어진 서북청년단을 자칭하는 사람들의 등장, 잇단 4·3 폄훼 발언이나 현수막 게시 등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정치정세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라고 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 의식과 공포, 그리고 정치적 이념이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넘어선다는 대립적 이념구조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제주도는 1차산업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갖고 있어 외국인 노동자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이들과 관련한 인권침해 사례도 많을 것 같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신강협 소장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았다.
"이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동남아의 한 불교국가에서 불교학과 석사학위까지 받고 온 사람이 있었어요. 스님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육계가공업체로 배정됐어요. 매일 5천 마리에서 많을 땐 만 마리까지 닭의 머리를 쳐야 하는 도살의 첫 과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지요.
이분이 너무도 심적으로 괴롭다고 호소하는 겁니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면 직종이 정해지기 때문에 지정한 업체에서만 근무해야 하고 이주의 자유도 없습니다. 저희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니 다른 일로 바꿔줄 수 없겠냐고 했지만 업체에서는 왜 귀찮게 구느냐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천주교 신부님의 협조를 받아 종교의 자유 침해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업체에서 이분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폭력문제가 발생하니까 그제서야 업체 측에서 사건을 무마하려고 공장에서 떠날 수 있도록 이직 허가가 나더군요.
외국인에 대한 이 같은 인권침해 사례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전 지구는 이미 한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해요. 기후 환경 이주 난민 전쟁 평화 등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거든요.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고,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평화의 섬 제주도'가 구호로 그칠 수 없다면, 제주도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맨 아래 단계부터 한 발짝 한 발짝 공감대를 이루면서 목표를 향해 나가자는 신강협 소장의 구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평화와 인권을 화두로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의 노력이 '왓'(들판)처럼 세상에 번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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