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5 10:41최종 업데이트 23.06.0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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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인생에서 고난이 없었던 시기는 별로 없다. 4·19 혁명 제2주년을 즈음한 시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도 그는 계속되는 고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뒤틀어졌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굴욕외교를 감행해 4·19를 짓밟았다. 그는 이승만이 쫓겨난 자리에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을 불러들였다. 그의 집권은 4·19 혁명을 짓밟는 반혁명이었다.


4·19는 36세 된 김대중에게 행운이었다. 1954년 총선(목포)과 1959년 재선거(강원도 인제군)에서 낙선한 그는 4·19 뒤에 치러진 19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또다시 떨어졌지만 그해 9월 8일 민주당 선전부장에 임명됐다. 집권당 대변인인 된 그는 이듬해 5월 13일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3전 4기로 당선되는 쾌거를 거뒀다.

하지만 사흘 뒤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의 출현으로 모든 게 뒤틀어졌다. 5월 16일 오후 5시 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국회 해산을 공포했기 때문에 3일 전 일은 없었던 일이 됐다. 5·16은 김대중 인생에도 반혁명이었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85년에 쓴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김대중은 5·16 직후 상황을 회고하면서 "도리없이 집안에 틀어막혀 있자 경관이 찾아왔다"라며 "나는 그들에게 체포되어 형무소에 처넣어졌다"라고 말했다.

집권당 간부라는 이유로 약 2개월 반 동안 수감됐다 풀려난 그는 이듬해에도 거듭 체포됐다. "1962년에는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라며 "이때도 한 달 이상 투옥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반 김대중 투쟁? 신부 측의 결혼 반대

한때는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그는 이 무렵에는 호주머니에서 먼지밖에 안 나왔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나는 당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백수였다"라고 한 뒤 "버스비가 없어 쩔쩔매기도 했고, 생활비가 없어 대학생 후배의 등록금을 빌려 쓰기도 했다"라며 "후배는 나 때문에 휴학을 했고, 그것이 평생 빚이 되었다"라고 털어놓는다.

어머니는 몸이 아팠고 누이동생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사별한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홍일(1948년생), 홍업 두 아들은 아직 어렸다. 4·19 제2주년 당시의 김대중은 이래저래 고달픈 한 남자였다.

이때 그에게 전환점이 된 게 이희호와의 결혼이다. 두 사람은 그해 5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장은 이희호의 외삼촌 집인 서울 종로구 체부동 주택이었다.

이날 일을 김대중은 "우리는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라고 한 뒤 "이희호, 그녀는 그렇게 5월 신부가 되어 내게로 왔다"라며 "그날 이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를 가장 이해하는, 나를 가장 아껴주는 내 여인이 되었다"라고 감격을 표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결혼.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이달 9일부터 23일까지 전북 군산시 현진갤러리에서 '김대중 생애 사진전'이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 세 번째인 올해 행사는 김대중 탄생 100주년(2024년 1월 6일)을 앞두고 열린다. 향토사학자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조종안 기념사업회장이 직접 찍은 것을 포함해 130여 점이 전시되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 1962년 5월 10일의 그 사진이다.

자서전에 쓴 감격적인 표현과 비교하면, 38세 신랑 김대중의 얼굴에서는 그런 감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40세 신부인 이희호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을 둘러싼 하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신부 오른쪽 2번째 여성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나머지 하객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객들과 찍은 사진.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엄숙한 결혼식장이라서 딱딱한 표정을 지었을 수도 있고 카메라에 덜 익숙한 세대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날 하객들이 어떤 마음으로 식장에 왔을지는 위의 버스비 이야기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김대중 자서전>은 "형편이 궁했던 터라 데이트 경비는 그녀가 거의 부담했다"고 말한다.

이 결혼에 대한 신부 쪽의 반대는 꽤 대단했다. 반(反) 김대중 투쟁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의 <이희호 평전>은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라며 "당사자는 마음을 굳혔는데 주위에서 이 결혼은 안 된다며 자기 일인 양 막아섰다. 가족이 반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YWCA 선후배들도 말리고 나섰다"라고 말한다.

가장 결정적인 반대 사유는 경제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희호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 내가 꼭 도와야 할 사람"(위 자서전 1권)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예전에 잘 벌었고 앞으로 재기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대응했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의 패러다임이 근원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신부가 이렇게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은 결혼식이었다. 눈치 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처가 쪽 한옥에서 예식을 올려야 했다. 김대중의 그날 심경이 어땠을지 짐작된다.

 

2015년 11월 5일 군산에서 열린 김대중 사진전.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김대중이 실업자가 된 것은 5·16 쿠데타의 결과였다. 그의 불행은 한국 사회의 불행과 궤를 함께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런 불행이 찾아온 배경을 '타력 혁명'에서 찾았다.

시민혁명을 일으킨 주체세력과 시민혁명에 힘입어 집권한 정치세력이 상호 불일치하는 상황을 후자의 관점에서 타력 혁명이라고 불렀다.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그는 "뭐니 뭐니 해도 장면 내각의 약점은 4·19 혁명이 자신의 실력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타력 혁명으로 집권을 획득한 정부는 마치 양자가 그 집에서 큰소리를 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면이 있다. 스스로가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므로 국민에 대해 권위가 없으며 혁명의 주체세력이 구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강력한 정치력도 생겨나지 않는다.
 
 
김대중은 민주당 정권이 1960년 판 촛불혁명을 지켜내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박정희에게 권력을 내준 이유를 타력 혁명으로 인한 정권의 한계에서 찾았다. 타력 혁명의 결과물을 지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어이없이 무너졌고, 민주당 정권뿐만 아니라 당시를 살던 한국 국민들도 그 후과를 감내해야 했다. 김대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력 혁명에 힘입어 집권당 대변인이 되고 그런 속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그는 박정희 등장 뒤에 말 못할 시련을 겪었다. 버스비 걱정은 단적인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1987년 8월의 군산 풍경.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이희호와 결혼한 후 활력 되찾은 DJ

이 시기에 김대중과 연인 관계로 만나던 이희호는 남자의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고백을 기다렸다"고 <이희호 평전>은 말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선뜻 마음을 낼 처지가 아니었다"라고 덧붙인다.

이런 답답한 국면을 깨트리는 상황이 4·19혁명 제2주년에 가까워지면서 발생했다. 주저하는 김대중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1962년 연초에 발생한 그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이었다. <이희호 평전>은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김대중은 앓았다"라며 "겨울 내내 김대중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랬던 김대중이 몸을 추스르자마자 벌인 일이 이희호에게 달려가는 것이었다. 3월 어느날 저녁 살이 쭉 빠진 모습으로 탑골공원에서 이희호를 만난 김대중은 "그동안 많이 아팠다", "몹시 보고 싶었다"라고 불쑥 마음을 꺼내보였다. 이희호의 눈가에 물기가 감돌자 그는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 "3월 어느날 저녁, 아직 한기가 감도는 탑골공원에서 결혼해달라고 말했다"라고 <김대중 자서전>은 말한다.

 

2015년 11월 5일 군산을 방문해 김대중 사진전을 둘러보는 이희호.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5·16에 의해 4·19가 수포로 돌아가자 낙심에 빠져 살았던 김대중은 4·19 제2주년을 즈음해 용기를 내어 프러포즈를 했다. 두 사람은 군사정권 주도의 제2주년 기념식이 열린 뒤인 그해 5월 10일, 눈치 주는 하객들 속에서 예식을 올렸다.

그 뒤 김대중은 활력을 되찾았다.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정치적으로도 그랬다. 이듬해인 1963년 7월 18일에는 민주당 재건에 참여해 대변인이 됐고, 대선을 엿새 앞둔 그해 10월 9일에는 훗날 자신의 사진전이 자주 열리게 될 군산을 방문해 시국 강연을 했다. 뒤이어 11월 26일에는 목포에서 제6대 총선에 출마해 실질적인 초선 의원이 됐다.

이희호와의 결혼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적·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고난을 겪던 김대중에게 전환점 같은 사건이었다. 2023년의 한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던 김대중은 이희호와의 결혼을 계기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군사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군산공설운동장에서 군사정권 주도로 거행된 4·19혁명 제2주년 기념식.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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