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6 18:31최종 업데이트 23.06.0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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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미 3백석은 효녀 심청뿐 아니라 웬만한 사람들도 마련하기 힘들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은 노비 몸값에 관해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이면 가격이 저화 4천 장이고, 15세 이하이거나 51세 이상이면 저화 3천 장이다"라고 규정했다.

노비에 관한 법규가 형벌 법전에 규정된 것은 범죄자를 노비로 만들던 고대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들을 거래할 때 지폐인 저화를 기준으로 3천 혹은 4천 장을 주고받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 때인 1402년부터 유통된 저화는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해 화폐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저화의 가치를 가늠하려면 다른 화폐로 환산해야 한다.


<경국대전> 호전은 "저화 1장은 쌀 1되에 준한다"라고 규정했다. 15세 이하나 51세 이상인 노비는 저화 3천 장에 거래됐으므로, 이들은 쌀 3000되에 거래된 셈이다. 3000되는 300말이고, 300말은 30석이었다. 이 연령대의 노비를 매매하려면 심청이에게 배당된 공양미 삼백석의 10분의 1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노비의 실제 매매가는 저화 3천이나 4천 장보다 낮은 수준에서 책정됐다. 실제 가격보다 높은 금액을 법전에 규정한 것은 노비 거래를 가급적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인신매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그런 거부감이 정도전이 실각된 뒤에도 계속 전승돼 <경국대전>에까지 반영됐던 것이다.

그런 배경 때문에 위 연령대 노비의 실제 몸값은 공양미 삼백석의 10분의 1보다 낮았다. 이를 감안하면 심청이가 그 삼백석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심청전>을 접한 조선 후기의 대중들도 당연히 부담을 느낄 만한 거액이었다.

그런 공양미 삼백석을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10인분이나 준비한 친일파가 있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이 바로 그다.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

"죽창으로 주민들 위협"

대한제국 멸망 5년 뒤인 1915년 7월 25일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이항녕은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인 19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고 1940년 3월 졸업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배치됐다. 학무국에 있다가 28세 때 하동군수가 된 그는 이곳에서 공양미 아닌 공출미 3천여 석을 거둬들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항녕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1년 5월 고등관 7등의 군수로 승진해 경상남도 하동군수로 부임했으며, 같은 해 7월 종7위에 서위되었다. 하동군수로 재직할 당시 하동군농회 회장과 하동군 미곡통제조합 조합장 등을 겸임했으며, 경상남도에서 하동군에 3만 석의 식량 공출이 할당되자, 부하 직원들을 독려하여 3000여 석을 공출했다.
 
이항녕이 거둬들인 공출미 3000여 석은 <심청전> 공양미 300석의 10배가 넘지만, 일제는 이를 못마땅해 했다. 애초에 할당된 3만 석의 10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좌천되는 원인이 됐다.

1991년 7월 12일 자 <한겨레> 13면 우하단에 따르면, 그는 퇴임 이후 처음으로 그해 7월 10일 하동군을 방문해 이곳 초등학교 강당에서 '도덕성 회복의 길'이라는 강연을 했다. 76세 생일을 앞둔 그는 이날 강연에서 "공출 실적이 도내에서 제일 나빠 43년 말 창녕군수로 좌천"됐다고 털어놓았다.

공출 실적 때문에 그는 전남과 경남의 접경인 하동군에서 경남 통영과 대구의 중간쯤인 창녕군으로 옮겨가게 됐다. 군수들이 선호하는 임지는 세금이 많이 걷히는 곳이었으므로, 하동군수가 창녕군수로 옮겨가는 것이 좌천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옛 군수의 강연을 들은 주민 정달호(만 79세)는 "일제시대 다른 군수들보다 이 박사가 모질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증언은 이항녕의 강연 내용과 배치된다. 위 기사에 따르면, 이항녕은 "한 톨의 곡식이라도 더 공출 받으려고 죽창으로 주민들을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게 맞아주신 하동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공출미 수탈 현장 일제는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빼앗아 갔다. ⓒ 눈빛<일제강점기>

 
죽창을 들고 군민을 위협하는 28세 친일파 이항녕의 모습과 맥이 닿는 장면들이 그 이전 시점에도 있었다. 그의 학창 시절에도 꽤 적극적인 친일의 순간이 있었다.

그가 고시에 합격한 시점은 1939년 10월이고 경성제대를 졸업한 시점은 1940년 3월이다. 두 시점의 중간에도 그는 친일에 나섰다. <친일인명사전>은 "1940년 1월 조선인의 자발적인 전쟁 동원과 황민화를 목표로 한 전시체제기 가장 대표적인 내선일체 민간단체인 녹기연맹에 연맹원으로 참여했다"라고 서술한다. 쉽지 않은 고시 생활을 끝마친 직후인데도 친일 활동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총독부 학무국 시절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일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중에도 친일단체 좌담회에 나가고 '신체제와 국가 이념' 같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다. 또 민간 단체인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황도학회는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받잡자는 취지였다"고 한 뒤 발기인 중 하나로 이항녕을 거명했다.

그처럼 적극성을 발휘했지만, 총독부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했다. 죽창을 들고 주민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지만 공출미 3만 석을 채우지 못한 그를 좌천시켰다. 그 상태로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한 그는 미군정하에서 군수로 유임되고 뒤이어 내무부 사회과장 발령을 받았지만 고사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반성하고 사죄

그해 연말에 이항녕은 교육자로 변신했다. 1990년 6월 12일 자 <매일경제> 17면 전면 기사에 따르면 그는 "해방 후에는 속죄하는 마음에서 교육계에 투신"했다고 회고했다. 1945년 연말에 부산 청룡국민학교 교장이 된 그는 양산중학교장·양산농업학교장을 거쳐 1949년에 동아대 교수가 됐다. 그 후 고려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을 거쳐 1960년 4·19 혁명 직후의 허정 과도내각하에서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1965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고 1971년에 홍익대 학장이 된 데 이어 이듬해에 총장이 됐다. 1980년에 총장을 그만둔 뒤로는 경향신문사 논설위원, 방송윤리위원장, 대한민국헌정회 이사장, 세계일보사 고문 등을 역임했다.

그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1940년 3월부터 5년간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이렇게 친일재산을 축적하며 동족을 괴롭힌 일에 대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반성하고 사죄했다. 친일할 때처럼 이런 일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친일청산 열기가 고조되던 해방 직후에 그는 미군정하의 공직을 고사하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4·19 혁명 뒤에는 친일 과오를 참회하는 <청산곡>이라는 소설을 6개월간 <경향신문>에 연재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돼 민주화세력이 일시적으로 강해지던 때인 1980년 1월 26일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해 다오'라는 참회의 글을 실었다.

1987년 6월항쟁과 1990년 전후의 탈냉전으로 세계 도처에서 민중의 기운이 강해지던 1990년대 초반에도 그랬다. 하동군을 방문한 것도 사죄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노무현 정권하에서 친일청산 기운이 고조되던 2005년에도 그는 거듭 사죄했다.

친일을 참회하는 방법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친일의 결과로 획득한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고, 친일청산 좌절로 인한 사회적 모순과 왜곡을 치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는 방법도 있다.

이항녕의 참회는 그런 단계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상당한 적극성을 띠는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기운이 고조될 때마다 일부 친일파들은 친일청산 불가론을 외치며 시대 흐름에 거역했다. 이항녕은 그런 뻔뻔한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중의 에너지가 고양될 때마다 그는 적극적인 반성의 자세를 보였다.

그런 태도가 기회주의적이라고 평가될 여지도 분명히 있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될 측면도 없지 않다. 그의 참회와 반성은 뻔뻔한 친일파들을 멈칫거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 친일행위와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극우세력을 곤란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다. 친일할 때도 적극적이고 친일을 반성할 때도 적극적이었던 이항녕은 2008년 9월 17일 9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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