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박병일은 서울 종로에서 사업에 실패해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도 실패해 사할린으로 옮겨갔다. 순수한 상업 경영으로 정면승부하지 않고 매국행위로 돌파구를 뚫으려다 시베리아에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업으로 곳간을 채우려 하려 하지 않고 친일 행위로 손쉽게 돈을 벌려 한 자의 모습이다.
사할린에 간 뒤로도 일본과 협력해 농지개척 사업을 벌이던 그는 1930년대에는 도쿄로 무대를 옮겼다. 사할린 활동 역시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도쿄에 거주한 이후의 박병일은 일반적인 친일파에게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벌이게 됐다. <박병일 소송사건철>이라는 문서철이 작성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상대로 소송
시베리아 항일운동이 조선 본토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자 총독부가 시베리아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벌인 사업이 있다. 조선인 구제사업 명목으로 식량 등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현지 한국인들이 항일세력에 기울지 않도록 하고자 그런 프로젝트를 벌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연합민회 회장이었던 박병일도 그 사업에 당연히 참여했다. 그런데 이 사업 과정에서 그의 개인 자금도 들어갔다. 박병일 사건철에 따르면 약 2만 엔의 금전 지출이 발생했다. 이 같은 지출을 보상해달라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박병일이 소송을 할 당시, 도쿄에서 객지 학생이 1개월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은 등록금을 제외하고 대략 40엔이었다. 1934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6면 우상단에 따르면, 하숙비·점심값·책값·교통비·오락비·잡비 등으로 대략 그 정도가 들어갔다. 박병일의 친일행위로 발생한 금전 지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한 돈을 들여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의 부역이 자발적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사업상 이익을 위해 그만한 돈을 투자했으리라는 합리적 해석을 갖게 한다. 친일이 이익을 준다는 계산이 행위에 저변에 깔려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에게서 나온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공허한 변명에 불과함을 박병일의 소송이 보여준다.
일본을 위해 2만엔 정도의 돈을 썼다면, 일본과의 협력으로 인해 박병일이 얻게 된 사업상 이익도 당연히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의 사업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의 소송으로 인해 총독부가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송은 볼썽사납게 끝나지는 않았다. 재판부의 화해 권유로 결국 양측이 합의에 도달했다. 박병일이 지출했다는 금액 중에서 4500원을 총독부가 보전해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총독부는 1936년 6월까지 이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애초에 요구한 금액을 다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친일로 인한 금전 지출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전 받았다. 그런 점에서 꽤 이례적인 친일파였다고 할 수 있다. 친일활동을 하면서 금전출납 장부까지 세심히 기록하는 '계산적인 친일파'였던 셈이다. 그 뒤 박병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출생 연도만 나타나고 사망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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