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와 함께 조선인 색출에 앞장섰던 박춘금. 일본 중의원까지 지냈으며, ‘대화동맹’에 이어 ‘대의당’이라는 친일 단체를 조직했다. 이광수나 김동환, 주요한 등도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내가 자랄 때 하의도는 섬 전체가 일본인의 소작지였다"고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1월 6일 전남 무안군 하의면에서 출생한 1924년에 문제의 박춘금이 이 섬을 공격했다.
이곳에서 발생한 하의도 농민운동을 탄압할 목적에서였다 <친일인명사전>은 "같은 해 7월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상애회원들을 동원하여 청년회를 습격"했다면서 "1928년 2월에도 지주인 도쿠다의 요청으로 하의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는 일본 지배세력의 하수인이 되어 동족들을 짓밟는 방법으로 살았다. 이것이 그에게는 돈벌이가 됐다. 삶 자체가 친일이고, 가진 것 자체가 친일재산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먹으로만 친일을 한 것은 아니다. 강연 등의 방법도 동원됐다. 강연을 통해 한국인들의 지원병·학도병 가담을 권유하기도 했다. 부민관에서 조문기 등의 폭탄 세례를 받은 것도 '주먹으로 하는 친일'뿐 아니라 '말로 하는 친일'에도 가담한 결과였다.
1943년 11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최로 부민관에서 거행된 '학병 격려 대강연회'에서는 한국인이 가야 할 길은 오로지 황민화뿐이라며 "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 5백만 민중이 잘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라며 한국 청년들에게 그 '4천이나 5천' 중 하나가 될 것을 독려했다.
일본 국회의원이 되다
박춘금은 폭력과 돈에 이어 이것들과 권력의 상관관계도 몸소 증명했다. 친일 폭력으로 자산을 축적한 그는 그 돈을 지원병훈련소 등에 기부하는 데도 썼지만, 일본 중의원 선거판에도 적지 않게 뿌렸다. 1932년에는 당선되고 1936년에는 낙선하고 1년 뒤 치러진 1937년 선거에서는 다시 당선되고 5년 만에 치러진 1942년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2017년 <일본어교육> 제81집에 실린 원지연 전남대 교수의 논문 <근대 일본의 식민지 동화주의의 실패 - 박춘금의 경우>는 박춘금이 도쿄에서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조선과 일본에서 축적한 자산을 포함한 거액을 사용하였다"라고 말한다. 친일 주먹질로 모은 돈을 도쿄 선거판에 뿌려댔던 것이다.
위 논문은 한국인인 그가 도쿄에서 중의원이 된 것은 내선일체 성공 사례를 만들어 홍보하려는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 식민지 조선에서 기반을 잡은 일본인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라고 설명한다. 조선 무대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국의회에 반영시키고자 박춘금을 지지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가 8·15 직전에 있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 당시 그는 한국에 있었다. 해방 뒤엔 일본으로 도피했다.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박춘금 송환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재일동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이어갔다. 재일본거류민단 중앙본부 고문이 됐다. 민족통일을 위한 활동에도 개입했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다. 한·일 문화교류에도 힘썼다. 1957년,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이 됐다. 1973년 3월 31일, 82세 나이로 '그의 조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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