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95)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19일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김영주 명예부위원장은 다리를 저는 등 거동은 불편해보였지만 특별한 건강 이상 징후는 없는 듯 보였다. 2015.7.19
연합뉴스
김영주의 경우도 그랬다. 김일성이 그를 대외관계에서 부각한 것이 그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은 그가 부총리에 임명된 그달부터 나타났다. 그가 부총리가 된 1974년 2월에 김정일이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점이 국내·외적으로 명확해진 것은 1980년이고, 북한 내부적으로는 이때부터 확실해졌다.
이처럼 남한 언론에서 김영주가 후계자로 한창 거론되던 시기에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됐다. 이로 인해 삼촌과 조카인 두 사람은 라이벌 구도로 엮이게 됐고, 그때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김영주는 그 뒤 존재가 희미해졌다.
김영주는 1975년 4월 제5기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 등장한 이후로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그 뒤 남한 언론에서는 '김영주가 이번 장례위원회 명단에 없다', '김영주가 당 간부 명단에 없다' 등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이로써 김영주는 조카와의 경쟁에 밀려 정계를 은퇴한 인물로 남한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됐다. 남한에서는 그와 김정일을 달과 해로 비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김영주를, 해가 떠 있는 동안 뜰 수 없는 달로 인식했다.
경쟁자가 아닌 조력자
그런데 달과 해가 함께 뜨는 이상 현상이 출현했다. 제1차 북·미 핵위기(북핵위기) 때인 1993년의 일이다. 한국전쟁 휴전 40주년 전날인 그해 7월 26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준공식에서 73세의 김영주가 근 20년 만에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김영주는 그해 12월 8일에는 노동당 제6기 중앙위원회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원이 되고, 다음날에는 제9기 최고인민회의 제6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그는 1970년대 초반의 위상을 회복했다.
그의 복귀 배경을 두고 설이 많았다. 개중에는 김정일의 권력 승계가 늦춰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달이 돌아왔으니 해가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런 분석을 낳았다.
하지만 그가 복귀한 이유는 명확하다. 1994년 4월호 월간 <북한>의 '돌아온 김영주는 실세인가'라는 기사가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의 한 고위 외교관은 올해 초 미국을 방문한 당시 한국일보와의 접촉에서 '김영주가 대남관계 사업팀을 신설, 이끌고 있다'면서 '그는 이미 복권되기 직전부터 대남사업과 공작에 대해 개입했던 것 같다'고 말했었다"라고 보도한 것처럼 그의 복귀는 남북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하필이면 1993년에 복귀한 것은 그가 남북관계를 주도했던 1970년대 초반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상황이 1993년에 펼쳐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1970년대 초에 남과 북이 7·4 공동성명에 합의한 것은 실제로 통일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고 중국과 일본이 화해하는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두 정권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는 듯이 하면서 상대방의 도발 가능성을 차단하고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남북 화해 무드를 연출했다.
이들의 동기가 거기에 있었다는 점은, 공동성명이 있었던 그해 하반기에 남한에서는 박정희 유신 체제가 성립하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등장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 김일성이 김영주를 남북관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대화 국면을 조성해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0년대 초반은 1970년대 초반보다 탈냉전 기운이 훨씬 강했다. 냉전에 기반을 둔 남북 두 정권은 이로 인해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대 초반의 남한에서는 공안정국이 이 상황의 돌파에 활용된 반면, 북한에서는 제1차 핵위기가 이 상황의 돌파에 유용하게 작용했다. 김영주 복귀는 이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김영주가 복귀한 뒤 북한 정부는 남한과의 대화에 적극성을 나타냈다. 핵문제까지도 남북회담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입장을 선보였다. 남한을 무시하던 종전의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김형기 전 남북회담사무국장이 쓴 <남북관계 변천사>는 김영주가 복귀한 뒤인 1993년 9월의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 측은 9월 1일 쌍방 최고책임자가 임명하는 특사가 비핵화 문제 및 긴장 완화와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공동대책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하자고 제의해, 핵문제를 남북한 간에 협의할 수 있다는 변화된 입장을 전해왔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같은 북한의 태도는 자국에 대한 국제적 압박을 완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화의 실질적 결실은 1994년 10월 21일의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이뤄졌지만, 핵위기 와중의 남북 접촉은 북한에 대한 압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에 남북대화에 나서 형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던 김영주가 김일성 사망 1년 전인 1993년부터는 비슷한 방식으로 조카의 권력을 안정시킨 셈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2세 김영주는 전면에 나선 반면, 73세 김영주는 후방에 있었다는 점이다.
형의 후계자로 거론되다가 조카의 부각과 더불어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조카에게 패한 사람'으로 비쳤던 김영주는 김일성 사망 1년 전인 1993년 등장해 조카의 권력 기반을 굳히는 데 기여했다. 김정일의 라이벌로 조명됐던 그는 이로써 김정일의 조력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됐다.
김영주는 북한에서 헌법 개정이 이뤄지고 김정일 체제가 법적으로 확립된 1998년 9월에 부주석직을 떠났다. 이듬해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 부위원장이 된 그는 2014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에 선출됐다. 최근 소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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