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이회창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김영삼 대통령. 1993.12.17
연합뉴스
그는 취임 다음 달 발생한 1994년 1월 낙동강 수질오염 사건 때부터 소신을 본격적으로 표출했다. 낙동강 현지로 날아가 관계기관 합동회의도 열고 수질 대책을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헌법 제86조 제2항을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가 아니라 '자기 소신'대로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부를 통할했던 것이다.
그런 이회창을 김영삼은 묵묵히 지켜봤다. 청와대 참모들은 불쾌해했지만, 김영삼은 속마음을 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원 약속까지 해주었다. 그런 속에서 이회창은 기회 있을 때마다 김영삼에게 헌법 강의를 했다. '총리의 헌법적 권한을 살려주셔야 한다'라는 취지였다. 법리를 따져가며 대통령을 조목조목 설득하는 모습은 군주에게 유교 덕목을 가르치는 선비 출신 신하들의 모습을 연상케 할 만했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을 벌인 김영삼은 6월항쟁을 거스르는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했다. 이 같은 반역사적 행위는 그의 성격적 특징 중 하나를 드러냈다. 이전에 적대했던 사람들과도, 마음이 맞지 않고 이념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필요에 따라 함께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정치인이나 정치지도자보다 훨씬 더 그런 인물이라는 점이 3당 합당을 통해 증명됐다.
그런 특성의 소유자가, 이전에 적대하지도 않았고 위협적인 세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이회창과의 공존을 불과 4개월 만에 끝낸 데는 당시의 객관적 사정도 한몫했다. 김영삼-이회창 조합의 공존을 어렵게 만드는 객관적 환경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 간 고성 오가고
그것은 1993년 연초에 개시된 제1차 북·미 핵위기다. 남북관계 및 한미관계에서 남한 정부의 자율성을 한층 위축시키는 핵위기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향해 달려가던 때에 이회창이라는 의외의 인물이 남한 총리로 등장했다. 남한보다는 북·미 양국의 의지에 의해 한반도 위기가 수습되던 시점에 대쪽 같은 인물이 남한의 '행정부 통할자'로 출현한 것이다. 남한 정부의 의지가 꺾이기 쉬운 시기에, 잘 꺾이지 않는 인물이 남한 총리로 등장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의 총리 취임 2개월 뒤인 1994년 2월 25일, 북·미 양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1994년 팀스피릿 훈련 중단, 북미 고위급 회담 개최, 특사 교환을 위한 남북 실무접촉 재개 등을 합의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남한 총리의 심기가 뒤틀어졌다.
그는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고압적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자신이 주재하는 남북고위전략회의에서 "남북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회담이 북측의 불성실한 태도로 지지부진하다면 차라리 남북 간 특사 교환 조건을 철회하고 한국의 동의 없는 미·북 간 합의에는 일체 불응하겠다는 배짱을 부려보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회창의 대쪽 소신이 북·미 합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총리가 주재하는 남북고위전략회의(전략회의)가 아닌, 총리가 배제되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조정회의)가 구성된 것이다. 통일·외교 분야에서 이회창 왕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회창 역시 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전략회의가 있는데도 조정회의를 별도로 설치하는 것은 총리를 허수아비로 전락시키는 조치라고 판단했다. 조정회의 역시 행정부 직무를 취급하므로 자신의 관할을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조정회의를 자기가 관리하기 위한 조치에 착수한 것이다. 4월 21일 그는 총리실 간부회의에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조정회의에 회부·조정된 안건은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도록 하라."
대통령이 총리를 조정회의에서 배제했는데도 조정회의 안건을 총리에게 보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회창 회고록>에 따르면 다음날 청와대 주례회동 때 대통령과 총리 간에 고성이 오갔고, 총리의 사의 표명을 대통령이 즉각 수리했다. 이회창은 김영삼으로부터 "이 총리는 어느 나라 총리냐?"는 말을 들은 뒤 마지막 악수를 하고 나왔고, 잠시 뒤 이영덕 통일 부총리가 새로운 총리로 지명됐다.
이회창과 김영삼의 충돌은 이회창의 대쪽 같은 원칙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국무총리 제도의 모순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 대결은 그런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현직 총리와 대통령 간에 벌어진 이 대결은 세상을 요란스럽게 할 정도로 진동이 컸지만, 두 사람 모두 큰 상처를 입지 않는 방향으로 종결됐다. 둘의 갈등은 행정부 내부의 문제로 끝났고, 이것이 행정부 외부로 벗어나지는 않았다. 공격수단이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이 충돌을 통해 이회창의 성격적 특성과 김영삼의 포용력 한계가 드러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자신을 정당화할 명분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이회창은 헌법상의 총리 권한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김영삼은 기존의 헌법상 관행을 따랐다는 점에서 자신을 지킬 명분을 남겼다.
공격 수단도 제한적이고 둘 다 명분을 지킨 이 권한쟁의를 통해 이회창은 대쪽 이미지를 강화하고 1997년 대선에 좀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김영삼과의 대결에서 정치적 출혈을 최소화하면서도 자기 강점을 부각하는 성과를 거뒀다
물론 이 대결 이후에 선보인 정치인 이회창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6월 항쟁 이후의 탈냉전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구·냉전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김영삼과의 갈등을 딛고 정치적 거목으로 성장해갔다. 그런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격 수단이 과도하지 않았고 또 명분도 지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대결은 이회창에게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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