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성 ‘여인과 두 아이’ 1930년대, 배운성(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촬영
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의 유럽에서의 활동은 점차 탄력을 받아 폭이 넓어진다. '압록강을 흐른다'라는 유명한 책을 쓴 한국인 작가 이미륵(1899-1950)과 가까이 지내며, 독일의 저명한 화가들과도 친분을 맺는다. 독일 사람들은 배운성의 그림을 좋아하여 주문도 늘어났고, 전시회에서는 그림도 제법 팔렸다.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전에도 자주 참석하며 작품을 출품하였다.
1933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제미술전에서 '여인초상'과 '자화상'을 출품하여 1등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는 1933년과 193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한다. 당시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배운성의 활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이런 유럽 각지에서의 활동은 결국 배운성을 세계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로 향하게 한다. 1937년 파리로 떠나 정착한 그는 권위 있는 '살롱 드 메'에서 여러 점이 입상하고, '르 살롱', '살롱 도톤느' 등의 전람회에도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화랑인 샤르팡티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며 화가로서의 꿈을 이룬다. 이때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이 한국의 전통 가무를 소재로 한 것이거나 한국의 무희 또는 풍속을 그린 것들이었다.
파리에서 잘 적응하여 살던 배운성은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자 급히 서울로 돌아온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인들은 고성에 숨도록 하고 외국인들은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18년만의 고국으로의 귀환이었다. 아쉬운 것은 너무 급히 돌아오는 바람에 그림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만치 당시의 상황은 다급하였다. 그는 돌아와 친일 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으나 잘 극복하고 화단 생활을 이어간다.
1949년 홍익대학에 미술과가 생기자 학과장으로 초빙된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생기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서양화부에는 추천작가가 되는 등 활발한 미술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이념에 따라 월북하고 만다. 그의 출생 이후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으나 뛰어난 화가 한 명을 잃은 한국 화단으로서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배운성은 근대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오랜 기간 유럽에 머물며 활동한 화가이다. 이종우, 나혜석, 임용련 등이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 적이 있으나 오랜 기간이 아니었고, 유럽 화단에서 눈여겨 볼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배운성은 유럽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활동을 한 작가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화가들의 유럽 진출 역사는 배운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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