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의 김광섭에 대한 경외와 우정은 작품 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김광섭의 서정적인 시는 김환기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산월(山月)' 연작도 '아리랑' 같은 노래 가사의 영향이 많았으나 김광섭 시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다. 1967년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과 함께, 한국의 산야와 달 등 자연에 많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 번은 혼자 말 같은 어조로 김광섭에게 멋진 제안을 한다. 한국의 시 중에서 어머니를 노래한 시들을 모아 각 편마다 그림을 그려서 자비 출판으로 호화판 시집을 을 내 봤으면 하는 뜻이었다. 덧붙여 나이가 들며 자꾸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말도 하였다. 그만큼 시에 관심이 많았고, 서정적 정서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김광섭과의 우정을 두텁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으론 이런 시에 대한 의식은 그림만으론 그려낼 수 없는 감성을 시인의 작업에서 이룰 수 있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결핍의 심정을 김광섭에게 투정하며 말하곤 하였다. "시를 써 주세요. 시인은 다복(多福)도 하여라"라는 말을 거듭해서 할 정도였다. 이는 동양 문인화 사상의 중심인 왕유(王維)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또 어떤 날은 동양의 서예를 응용하여 새로운 추상의 세계를 개척한 미국화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을 부러워하며,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높은 격조를 닮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도 동양의 사고를 세계화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는데, 이미 이루어 낸 작가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그는 이런 마음을 김광섭과의 소통을 통해 구체화하곤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교류는 진실한 예술의 경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미술과 문학을 초월한 우정은 결국 한국 미술사를 빛낼 걸작을 만들어낸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그동안 그려왔던 구상 회화나 반 구상 회화에서 더 나아가 완전한 추상 작업으로 변신을 꾀한다.
그는 광목을 이용하여 커다란 캔버스를 꾸미고, 그 전면에 점을 찍기 시작한다. 검은색, 푸른색으로 시작한 점은 점차 노란색, 빨간색으로 넓혀 간다. 이 점들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무수히 많은 별을 화면에 옮긴 듯한데, 이 작품들은 훗날 '점화(點畵)'라 불리며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이 된다.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이 창설되자 주최 측은 뉴욕에 있는 김환기에게 작품 출품을 요청한다. 사실 심사위원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그에게 출품을 요청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으나, 그는 오랜만에 한국 전시에 출품한다는 마음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한다. 화면 가득히 검푸른 점을 빽빽이 찍은 이 작품은 대상 수상을 하며 화제에 오른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보듯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느끼는 감성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에 자연스럽게 찍힌 많은 점들은 김광섭 시 속의 수많은 별이고 사람들이다. 김환기가 그동안 그려왔던 자연의 질서를 하늘 곧 우주로 넓혔을 뿐 그의 마음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김환기는 외로운 뉴욕에서 고국과 고국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한 점 한 점 화폭에 찍었다. 이 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화면 속을 맴돌며 김환기의 그리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면에서 김환기는 늘 꿈꾸어 왔던 동양적 사고를 서양식 화면에 격조 있게 옮기려 한 노력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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