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8 07:12최종 업데이트 24.04.1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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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에 64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한다는 미국 상무부의 발표 요약 ⓒ 미국 상무부 홈페이지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로부터 최대 64억 달러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9조 원이나 되는 큰 금액인데, 이 소식을 전하는 언론들은 "파격 지원", "역대 3번째 규모" 등의 표현을 쓰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통령님에게 이 보조금이 뭘 의미하는지, 미국 정부는 왜 이렇게 큰돈을 쓰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상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대 64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4나노 및 2나노 공정 기술의 파운드리 팹 건설에 더해 차세대 연구개발(R&D)용 팹과 3D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생산하는 패키징 시설까지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기존 팹에 삼성전자가 밀고 있는 FD-SOI(완전 공핍형 실리콘 온 인슐레이터) 첨단 공정의 웨이퍼 생산을 위해 추가 투자를 할 예정이고 여기에는 미국 국방부와의 협업도 약속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곳에서 설계 및 제조되는 반도체는 통신, 자동차, 고성능 컴퓨팅뿐만 아니라 인공 지능과 미국의 방위 산업에도 쓰일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의 전체 투자 금액은 기존의 17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크게 늘었습니다. 향후 30년 동안 30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대통령님의 세계 최대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에 비하면 모든 게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2나노 수준의 최첨단 팹, 최초의 연구개발 팹, 최신 패키징 시설, 미국 국방부와의 협업, 거기에 지역 대학과 연계한 인력 양성까지, 미국 텍사스에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가 삼성전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겁니다.

미국 상무부는 이번 투자로 5년 이내에 1만 7000개 이상의 건설 일자리와 4500개 이상의 고임금 제조업 일자리가 창출될 거라고 밝혔습니다. 삼성전자는 이런 내용이 널리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별다른 보도자료를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삼성의 이런 반도체 생태계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생기는 걸 기대할 테니까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위치한 삼성 오스틴 반도체 공장. ⓒ 연합뉴스

 
삼성전자만 보조금을 받는 건 아닙니다. 미국 상무부는 이미 미국 인텔에 최대 85억 달러, 대만 TSMC에 최대 66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삼성전자와 달리 인텔과 TSMC는 각각 보조금 외에 110억 달러와 50억 달러를 추가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대출금을 더하면 인텔은 삼성전자보다 약 3배의 자금을 조달하게 되는 겁니다.

인텔은 ASML의 최신형 노광장비인 하이 NA EUV 장비를 세계 최초로 설치한 오리건주의 반도체 팹을 비롯해 18A 공정을 사용하는 최신 파운드리 팹의 신규 건설 및 기존 팹의 개조에 보조금을 사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TSMC는 애초 애리조나주에 두 개의 팹을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발표를 통해 향후 10년 안에 세 번째 팹까지 건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첫 번째 팹은 4나노 팹, 두 번째 팹은 2나노 팹이 될 것이며 세 번째 팹은 그보다 훨씬 미세 공정이 가능한 최첨단 팹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세 회사 모두 각각 약 4000만 달러 이상의 금액을 건설과 반도체 인력 양성에 쓰겠다고 밝힌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보조금을 받으면 미국에 최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의 인력 양성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보조금 받는 회사들의 특징

보조금을 받기 위해 600건 이상의 투자의향서가 접수되었다는데 지금까지 미국 상무부가 공식 발표한 반도체 보조금 수혜 대상 회사는 모두 6개입니다. 그 중 인텔, 글로벌 파운드리, 마이크로칩은 미국 회사이고, TSMC는 대만, BAE시스템즈는 영국 회사입니다. 미국 회사 셋과 외국 회사 셋인데 눈에 띄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텔은 세계 최고의 중앙처리장치(CPU) 제조회사일 뿐 아니라 최첨단 파운드리 사업에도 진출한 상태입니다. TSMC, 삼성전자, 글로벌 파운드리는 세계 1, 2, 3위의 파운드리 회사입니다. 마이크로칩은 자동차와 비행기 등에 많이 쓰이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을 만들고, BAE시스템즈는 미국의 F-35 전투기 등에 사용되는 군사용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보조금을 받게 된 회사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업체 아니면 군사용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여기에 메모리 반도체 회사는 아직 없습니다.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회사이자 세계 3위인 마이크론은 아직 보조금 지급 대상이 아닙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인 SK하이닉스 역시 아직 보조금을 확정 짓지 못했습니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메모리 반도체 팹이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팹에 보조금을 받은 겁니다.

반도체 생산 시설에 대한 직접 보조금 390억 달러 가운데 지금까지 6개 회사에 약속된 금액은 약 230억 달러, 남은 160억 달러를 가지고 나머지 반도체 회사들이 나눠 가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이 보조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삼성전자 수준의 큰 금액은 아닐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조금을 받는 회사들을 보면 미국 상무부가 미국 반도체법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AMD, 애플, 엔비디아, 퀄컴 같은 미국 기업이 설계한 최첨단 반도체를 미국 내 삼성전자, 인텔, TSMC 팹을 통해 최종 생산하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더해 방위산업에 필수적인 시설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범용제품인 메모리 반도체는 지금처럼 한국과 동남아에서 생산하더라도 수급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모습입니다.

미국이 반도체 팹에 보조금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
  

우리도 반도체 보조금을 지급하라는 사설이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줄을 잇습니다. ⓒ 구글 검색 화면

 
미국의 반도체법과 보조금 이야기만 나오면 많은 언론이 우리도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떠나지 않도록 보조금을 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통령님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지난해 나라 살림 적자가 87조 원에 이르고, 국내총생산(GDP) 기준 국가채무비율이 사상 처음 50%를 넘은 상황에서 우리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드는 게 옳은 일일까요?

미국이 반도체 생산시설을 미국에 유치하기 위해 거액의 보조금을 뿌리는 이유는 그 정도의 보조금이 아니면 다국적 반도체 회사들이 미국에 반도체 팹을 지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미국에 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만에 비해 최소 50%, 경우에 따라서는 두 배의 비용이 든다며 미국 진출에 부정적인 의견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테일러 팹의 건설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비용뿐만 아니라 인력 운영 측면에서도 미국은 한국이나 대만에 비해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반도체 팹은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2교대 내지 3교대 노동을 해야 합니다.

웨이퍼를 생산하는 팹 내부는 먼지 발생을 막겠다고 바깥보다 기압이 살짝 높고, 조명도 웨이퍼에 영향을 덜 주는 노란색을 씁니다. 그 안에서 온몸을 감싸는 방진복을 입고 일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수많은 가스와 화공약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도 큰 곳입니다. 우리는 최첨단 산업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3D업종으로 분류하는 게 맞습니다.

2022년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내놓은 "반도체 산업 구도 변화와 경쟁력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각국의 반도체 자급화에 놓인 걸림돌이 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첨단 제조장비 및 소재, SW 인프라 풍부, 높은 팹리스 점유율(68%)" 등이 강점으로 "반도체 제조업에서 필요한 인력 수급 제한적, 반도체 제조 문화에 대한 호응 부족"이 약점으로 적혀 있습니다. 미국에선 반도체 팹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렵고, 실제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 어려운 작업환경에 잘 버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반도체 자급화 관련 미국은 "반도체 제조 문화에 대한 호응 부족"이 약점으로, 한국은 “반도체 제조업에 적합한 기업문화”가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미국과 정반대로 팹리스 업체가 적고 장비, 소재, SW 인프라는 부족하지만 "반도체 제조업에 적합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점을 강점으로 꼽았습니다. "기업문화"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한마디로 한국의 노동자들이 그런 작업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지시에 따라 일을 한다는 겁니다. 미국이 팹리스 회사를 만들어 반도체 설계만 하고 반도체 팹은 한국이나 대만, 동남아시아 국가에 외주를 맡긴 이유입니다.

하지만 미·중 갈등 속에서 반도체가 산업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해지다 보니 거액의 보조금을 줘서 반도체 중에서도 수급이 안보에 영향을 주는 반도체 위주로 미국에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겁니다.

같은 파운드리 업체 간의 경쟁에서 인텔이나 글로벌 파운드리 같은 미국 회사들만 보조금을 받고 삼성전자만 못 받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다행히 삼성전자와 TSMC 모두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메모리반도체 회사에는 아직 보조금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경쟁 구도에 별 영향이 없습니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입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회사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 건 나쁠 게 없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용 팹을 미국으로 옮겨갈 이유가 사라졌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보조금이 없으면 반도체 팹 경쟁력이 떨어져 아무도 팹을 지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어쩔 수 없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일본, 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반도체 관련 인력과 인프라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반도체 회사들을 유치하기 위해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해 더 필요한 일 
 

삼성전자 화성단지 전경. 반도체 팹 주위로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습니다.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짓는 게 필요합니다. ⓒ 삼성전자


한국은 그런 보조금이 아니더라도 이미 반도체 하기 좋은 나라입니다.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성장했고, 노하우는 쌓여 있고, 경험 있는 인재가 많으며, 소재, 부품, 장비 관련 생태계가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스템반도체와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을 뿐 반도체 제조 기술은 대만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대만 역시 반도체 팹을 건설하겠다는 회사에 별도의 보조금을 주지 않습니다. 보조금이 문제가 아니라 최신 팹을 짓겠다고 해도 반대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2023년 TSMC가 대만 북부 신주과학단지에 1.4나노 최신 팹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지역주민의 반발로 중부 타이중으로 옮겨 건설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과 전기를 많이 쓰는 반도체 팹이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반도체 산업이 우리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긴 하지만 반도체가 다른 산업을 다 무시하고 전적으로 지원해야 할 만큼 중요한 건 또 아닙니다. 대만처럼 한 나라의 경제가 특정 산업 혹은 특정 회사의 흥망에 좌우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미국 역시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미국에 필요한 분야를 철저히 가려내서 꼭 필요한 회사만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보조금을 받은 회사가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내면 환수하는 규정도 있습니다. 보조금을 받는 대신 중국에는 투자를 못 하는 가드레일 규제도 있습니다.

미국이 삼성전자에 거액의 보조금을 줘서 미국에 반도체 팹을 짓도록 유도하고,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할 것 없이 많은 나라들이 보조금 경쟁에 나서고 있으니 우리도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광고주인 재벌에 잘 보이려는 언론의 자발적 충성일 수도 있고요.
      
물론 보조금 지급을 고려해 볼 상황도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미국 테일러에 조성하는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를 수도권 외의 지방에 조성하는 경우, 또는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방에 이전하여 조성하는 경우에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지원이 가능할 겁니다.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하는 다국적 반도체 회사가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짓고 현지인을 고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도체 하기 좋은 나라 한국에서 수도권 입지만 고집하는 기존의 반도체 회사에 보조금을 주자는 건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다른 산업에 대한 차별일 뿐입니다. 효과도 검증 안 된 반도체 보조금 대신 대통령님이 깎아 버린 R&D 예산을 되살리는 게 우리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더 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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