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8 17:11최종 업데이트 23.10.18 17:11
  • 본문듣기

2018년 7월 2일, 당시 감기몸살에 걸려 6월 28일부터 휴가를 내고 휴식을 취해 온 문재인 대통령이 공식 출근해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입장하자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 시간이 월요일 오후 2시로 정해졌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 사항이다. 정부 출범 달포 뒤 일이다. 이유가 있다. 직원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몇 시간 늦추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렇지 않다.

대부분 조직에서 월요일 오전 보스가 회의를 주재한다. 청와대에서 월요일 오전 10시쯤 회의를 열려면 보고서, 회의 자료를 새벽까지 완성해야 한다. 비서관, 수석이 확인하고 결재해 최종본이 대통령에게 제출되는 시간을 역산(逆算)하면 그렇다.


정본 보고서는 하루 이틀 전에 대통령 손에 들어갔다. 국정 상황은 분초 단위로 변한다는 게 문제다. 보고서에는 최종 상태를 담아야 한다. 작은 변화라도 있으면 내용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상황이 복잡하거나 유동적이면 월화수목금금금 일한다.

참모에게 공 돌린 대통령

문 대통령은 이런 사정을 알았다. 그래서 참모들, 특히 실무자가 일요일 밤늦게 일하지 않도록 회의 시간을 반나절 늦춘 것이다. 문 대통령은 휴식을 강조했다.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직원들 연차 휴가를 안 보내면 비서관 인사 평점을 깎겠다"라고 말했다.

충분한 휴식을 누릴 수는 없었다. 일 자체가 많았다. 다양한 의제, 어찌 보면 한국과 관련된 모든 일을 다루다 보면 야근을 밥 먹듯 했다. 노무현 대통령 말처럼 국민은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청와대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청와대 직원 중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천생 맡은 일을 꼼꼼하게 챙기고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저녁에 청와대 인근 삼청동 식당을 가보면 야근하느라 끼니를 때우는 다른 청와대 팀과 마주쳤다. 사무실에는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늘공(늘 공무원인 사람, 직업 공무원)이든,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이들)이든 청와대 근무를 원하는 이들은 쌔고 쌨다. 아무리 연줄이 튼튼해도,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아야 올 수 있었다. 역량 있는 이들이 왔고, 기대에 걸맞게 성실했다. 그러니 피로는 달고 살았다.

문 대통령은 비용과 차량이 잘 지원되는지도 챙겼다.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여러 번 "예정에 없던 비용을 자비로 치르면 총무비서관실에 가서 꼭 받아라"라고 당부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수석과 비서실장 시절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다.

공은 직원에게 돌렸다. 자긍심을 세워주는 최고의 방편이다. 정부 출범 1주년쯤이었다. 한국갤럽 2018년 5월 첫째 주 조사에서 대통령이 잘한다는 응답은 83%였다. 이 업체의 같은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았다. 노태우 대통령 45%(1989년 1월), 김영삼 대통령 55%(1994년 1월), 김대중 대통령 60%(1999년 3월), 노무현 대통령 25%(2004년 3월), 이명박 대통령 34%(2009년 2월), 박근혜 대통령 56%(2014년 2월)였다.

문 대통령은 그해 5월 14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다. 국정운영이 잘됐다고 평가받으면 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 잘한 것이고, 비서실장 중심으로 비서실이 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총리 등 내각 평가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의전 총리가 아니라 실제 중요한 국정의 축이다. 비서실도 비서실장 등이 내가 보기에도 평가가 좋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한 달 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했다. 6월 18일 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일부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덕분이다, 대통령 개인기가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지만, 온당치 못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어 "대통령이 혼자서 잘할 수가 없다. 대통령이 뭔가 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면 함께 한 청와대 비서실과 문재인 정부 내각이 잘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 말은 참모들 얼굴에 미소를 자아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냥 사람 좋은 회사 대표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진짜 이야기는 다음부터다.

추상(抽象)이 아닌 구상(具象)을 요구한 '빡센' 대통령
 

2018년 7월 2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자영업담당비서관 신설 사실을 알리는 문 대통령의 모습.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직원들에게 잘해준 이유가 있었다. 시쳇말로 '빡세게' 부려 먹으려고 그랬다. '불편함이 없게 해줄 테니 힘내라, 공은 다 당신들 몫이다.' 잘해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쥐어짜 일을 했다. 그리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술이든 골프든 좋아하는 일을 양껏 하고, 쉴 때 다 쉬다가 일 터졌을 때 아랫사람을 닦달하는 보스도 있다. 책임을 밑에 떠넘기고 사람을 잘라 실패를 마무리하는 리더도 있다. 그런 보스 말이 밑에 통할 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혹사하다시피 하면서 직원들을 독려했다. 말을 안 들을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이들이 제1부속실장이다. 임기 초반 송인배, 조한기 부속실장이 곁을 지켰다. 이들은 한숨과 함께 "뭐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론을 배격했다.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를 요구했다. 보고서를 올리면 관련 자료를 찾아 올리라는 지시가 수시로 떨어졌다. 정확한 수치와 배경, 경과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대통령이 추상(抽象)이 아닌 구상(具象)을 요구하자, 참모와 공무원들도 그 방향에 맞춰 일을 했다. 이는 스케치하는 것과 설계 도면을 작성하는 일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스케치는 조금 삐뚤어도 덧칠해서 맞추면 된다. 설계 도면은 눈금 하나만 잘못 그려도 전체가 엉클어진다. 일은 많아지고 힘들어졌다.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 때 벌어진 한 사건은 청와대 참모들을 긴장케 했다. 어음 제도 개선책이 보고됐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한 대선 공약 중 하나다. 보고는 10분 만에 끝났다. 좋은 취지고, 무리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내지도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담당자가 답변하면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을 또 던졌다. 어찌나 집요하던지 재판정의 신문(訊問) 같았다. 상황은 20여 분간 지속됐다. 회의장 분위기는 차츰 얼어붙었다. 두 사람 간 질의응답 말고는 속기사 두 명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음은 기업이 자금을 융통하는 수단이다. 약자인 납품·하도급 업체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받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소상공인과 하도급 업체의 하소연을 들었다. 대선 공약으로 채택했다. 제도의 허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담당 비서관은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맡은 여러 정책, 지원책 중 하나였다. 정책 차원에서 접근했기에 현장 일에는 밝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답을 내지 못했다. 결국 다시 보고하도록 했다.

이날 일로 청와대 긴장도도 함께 올라갔다. '좋은 취지와 방향'으로 준비하던 보고를 '구체적 목표와 대책'으로 바꿔야 했다.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이 뭔지 구체적으로 답해야 했다.

2017년 7월 25일 국무회의에서다. 서민 부담 경감 대책이 보고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론보다 구체적 방안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중산층과 서민 소득을 높이고 필수 생계비를 낮추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라면서 "(보고서에 있는) 도시가스 요금 1~9% 인하, 이런 게 아주 도움이 되는 구체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늘 팩트(fact), 수치, 통계를 요구했다. 나도 경험했다. 2019년 1월 28일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를 앞뒀다. 인사말 원고를 준비하며, 설 명절을 소재로 삼았다. 명절 자동차 사고 경각심을 높일 발언을 골랐다.

말씀 자료를 올렸더니, 피드백이 왔다. 원래 원고에서 '사고가 줄었지만'이라는 대목에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문 대통령은 그 위에 물음표(?)를 그려놓았다. 아차 싶었다. 수치를 확보했다. 원고를 고쳐 다시 보고했다. 문 대통령 실제 발언은 이랬다.

"설 연휴를 앞두고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안전 문제입니다. 교통사고, 화재, 산재 등 3대 안전사고 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설 명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통안전입니다. 우리 정부 들어 2017년과 2018년 연이어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많이 줄고 있고, 설 연휴 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2016년 60명, 2017년 43명, 2018년 37명으로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올해 설 연휴 이동 인원은 매일 700만 명, 특별 교통 대책 기간 7일 동안 5,0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숫자를 넣자 위험이 구체화했다. 왜 조심해야 하는지 피부에 닿았다. 교통 당국과 경찰 및 소방에도 명확한 목표가 제시됐다. '안전을 도모하라'가 아니라 '사망자를 줄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에서도 추상과 관념보다 실례(實例)를 짚어냈다. 2017년 8월 15일 그는 취임 후 첫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를 낭독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먹고,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현실임을 증거로 들려줬다.

"경북 안동에 임청각(臨淸閣)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전 가산(家産)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힌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습니다."


생생한 실례가 관념, 개념보다 백배 낫다. 주로 말로 전달하는 연설, 설명,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의 몫
 

2018년 10월 25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은 바쁘다. 일중독이 아닌 이는 버티기 힘들 정도다. 2018년 10월 25일 공개된 하루 일정은 이렇다. 오전 9시 10분 대통령 집무실 티타임에서 당일 일일 보고를 받는다. 이어 정책실과 안보실 보고가 있다.

큰 건으로 쌀 목표 가격 변경 계획이 보고됐다. 한국 사회에서 쌀값만큼 민감한 가격은 드물다.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무엇보다 농심(農心)이 걸려있다. 라면회사 말고, 한국 농민의 민심 말이다. 한국 정치인 중에 농민을 가볍게 볼 이는 아무도 없다. 농심에 역행하는 언행을 하면 당 전체에 충격이 간다.

뙤약볕에서 허리 굽혀 일한 농민을 생각하면 위정자들은 쌀값을 많이 쳐주려고 한다. 현실은 받쳐주지 못한다. 한국이 기축통화를 발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제7광구에서 유전이 터지지 않는 한 재정은 쪼들린다. 그렇다고 쌀 가격을 시장 원리대로 낮추면 '식량 자원이 위기다, 나라 근본이 흔들린다'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난제 중의 난제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으로 가서 73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집무실로 돌아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문성현 위원장의 보고를 받았다. 안건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동 현안 추진 전략이었다.

노동 문제는 쌀값 문제 못지않게 해법 찾기가 어렵다. 노동계와 산업계 줄다리기에서 대통령은 심판 역할만 할 수 없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황희 정승이라도 손을 내저을 일이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참여를 거부했다. 문 대통령 구상과 민주노총 구상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노사정 협의는 지지부진했다. 경사노위 출범식 및 1차 회의에서 문성현 위원장은 속상함에 눈물까지 훔쳤다.

경사노위 보고에 이어 비서실 현안 보고도 있다. 생활 밀착형 이슈도 다룬다. 라돈 매트리스, 발암물질 생리대 같은 일이다. 무엇 하나 "알아서 잘 해결하라"라고 넘길 수 없다.

10월 25일만 특별히 바쁜 날이었을까. 10월 29일에도 일정이 8개였다. 대체로 확정된 하루 일정만 5, 6개다. 중간에 수석이나 비서관들이 긴급하게 보고하러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안은 둘 중 하나다. 우선 칭찬받을, 생색 나는 일이다. 보고자 얼굴만 봐도 안다. 발걸음도 가볍다.

하지만 대부분은 골치 아픈 일, 결단하고 책임질 일, 욕먹을 일이다. 보고자와 배석자 이마는 구겨져 있다. 이따금 한숨을 쉬고 걸음도 무겁다. 최종 의사결정과 책임은 대통령 몫이다. 잘 안됐을 때 이런저런 이유를 댈 수야 있다. 결국 대통령이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 자리는 그런 자리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