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2 07:15최종 업데이트 23.10.12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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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 가운데는 20대 여성이 가장 많았다. ⓒ unsplash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재부상) 이후 출판가에는 '미친 여자들'에 관한 책이 넘쳐났다. 20대 여성의 기분부전장애를 다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데 이어,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을 앓았던 미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냅의 유고 에세이집 <명랑한 은둔자>(바다출판사)도 30‧40대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2021년에는 성 불평등하게 찾아오는 우울에 관한 사회과학서 <여자라서 우울하다고?>(개마고원)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동아시아)이 나란히 출간됐다.

우울증 환자 첫 100만 명 돌파... 20대 여성이 가장 많아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20대 여성이 가장 많다는 최근의 보도는, 그래서 놀랍지 않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우울증 환자 수는 100만 744명이다.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18년(75만 2976명)에서 2020년까지 해마다 4만 명 남짓 늘던 우울증 환자 수는 2020년을 기점으로 한 해에 8만 명씩 증가했다.


성별을 축으로 나누면 지난해 기준 여성 우울증 환자 수(67만 4555명)가 남성(32만 6189명) 보다 2배 이상 많다. 상기한 것처럼, 성별‧연령을 함께 따졌을 때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은 층위는 20대 여성이다. 12만 1534명으로 전체의 12.1%다. 최근 5년간 가장 가파르게 우울증 환자가 증가한 집단도 20대 여성이었다. 5년 새 무려 110.7%나 늘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 까닭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나온다. 정신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전 같지 않아 병원 방문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 사람들 간 사회적 고립이 심화됐던 코로나19 팬데믹이 기폭제라는 진단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 3월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격상시킨 것을 감안하면 우울증 환자 수가 2020년부터 가파르게 상승한 것은 필연적인 일로 보인다.

여성 환자가 더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감정이나 날씨 같은 외부 요인에 취약한 여성 호르몬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여자는 정말 호르몬 탓에 우울할까. 그렇다면 여자는, 여자라서 생래적으로 우울하다는 말인가. 책 <여자라서 우울하다고?>를 쓴 이민아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 반기를 든다. 사회경제적 지위나 인종에 따른 정신건강의 격차를 얘기할 때, 아무도 호르몬으로 인한 감정 기복을 얘기하지 않는데 유독 여성의 우울을 거론할 때만 호르몬 탓을 하느냐고.

'미친 여자들', 사회적 맥락 속에서 터져 나오다
 

하미나 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표지 ⓒ 동아시아

 
2010년대 중후반, '미친 여자들'에 대한 책들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여성학자 임옥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개인적 차원에서 다뤄지던 여성의 우울을 사회적 맥락에서 다루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나는 20대 여성들의 우울증 진단이 늘어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이들 사이에 여성의 우울은 더 이상 '태생적으로 심약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에 의한 것이라는 정서가 생겨났다. 이러한 청년 여성들의 탄생에, 출판계가 기민하게 대응한 것이 '미친 여자들'에 관한 책 출간 러시로 이어진 셈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청년 여성들은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 공간에 자신의 심적 고통에 대해 직접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2016), 미투 운동(2017), N번방 성착취 사건(2019) 등은 이들의 억압돼 있던 울분을 밀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두고 "살아남았다"던 반응이야말로, 언제든 젠더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내내 안고 살았던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2016년부터 2019년 2월까지 트위터(현재 'X') 데이터를 통해 우울 경향 이용자들의 텍스트 양상을 분석한 서하림(2019)은 이들이 여성 및 성범죄 등 여성 인권이나 사회 이슈에 관련된 단어들을 자주 언급했다고 전했다. 비우울 경향 이용자가 다양하고 일상적인 성격의 주제들을 많이 언급하는 것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들 우울한 여자들(한국에서 트위터는 전형적인 '여초' SNS다)은 다른 이들보다 젠더 불평등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스스로 발화함으로써 다른 여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려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팬데믹' 앞에서도 더욱 취약했던 여성
 

2021년 3월 8일, 정치하는 엄마들,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기자회견을 열고 20대 여성 자살률의 사회적 문제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 이희훈

코로나19라는 공통의 변인을 놓고서도, 사회적 재난 앞에서 더욱 취약했던 여성의 형편을 고려해야 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만 25~54세 여성의 42.6%가 경력 단절을 경험했다(여성가족부 '2022년 경력 단절 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 코로나19 유행 전인 2019년 조사에서는 35%였던 수치가, 3년 새 7.6%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한국 남성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는 2021년 기준 18%포인트를 넘어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7배 수준이다.

일터에서의 '코로나 블루'도 여성들에게 더욱 집중됐다. 지난해 1월 발표된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이 '심각하다'고 응답한 여성 노동자는 16.6%로, 남성(8.8%)의 2배에 가까웠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19.1%는 우울감이 '심각하다'고 답변함으로써, 남성 정규직(6%)의 3배를 웃돌았다. 이를 두고 직장갑질119에서는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여성들이 코로나19 여파가 큰 서비스업종에 종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페미니즘 리부트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재해석되던 여성의 우울은 최근 백래시(반발)에 부딪혀 '개인의 문제'로 회귀하고 있다. 여성의 우울을 논할라치면 "너만 힘드냐"는 악에 받친 딴지에 부닥치거나, "남자도 힘들다"는 물음에 같이 응답하라는 요구를 듣는다. 그래서 '리부트' 당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토로와 달리, 지금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자기 검열을 거쳐야 한다. 자신의 우울에 대해 인정 투쟁을 벌여야 한다거나, 조롱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에서 우울감을 호소했던 10대 여성이 뭇 남성들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된 데 이어 극단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것처럼.

우울증 환자들 중 20대 여성 비율이 가장 많다는 기사에 '여성 호르몬 탓'이 먼저 거론되는 것은 '미친 여자들'이 온몸으로 증명해 온 구조적 성차별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시도다. 하도 많이 되뇌어서 식상해 보이지만 그만큼 절실한, '성평등 실현'이 여성들 정신 건강 증진에 선결 조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민아, 2021, <여자라서 우울하다고?>, 개마고원
서하림, 2019, ‘소셜미디어를 통한 우울 경향 이용자 텍스트 양상 분석’,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국내석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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