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4 13:29최종 업데이트 24.04.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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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합니다. "밥 먹었어?"는 한국만의 독특한 인사법이기도 합니다. 최근 일본 TBS 드라마 <Eye Love You>의 한국인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윤태오(채종협 분)는 유독 밥을 강조합니다. 여자친구이자 회사 사장인 유리(니카이도 후미 분)와는 한식을 챙겨주면서 친해졌습니다. 그가 "맛있는 밥은 최고의 에너지 충전이에요. 그래서 저는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꼭 밥을 먹어요. 맛있게 먹어요"라고 유리에게 말하는 걸 보면서, 밥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극대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정훈님은 제게 "언론노동자인 기자님은 요즘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충실히 듣고 있다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체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마음이 아파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하거나 겨우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 말입니다.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온 동네에 퍼지다 보니, 그들이 힘없이 읊조리는 목소리는 왠지 잘 들리지 않는듯합니다.

한동훈의 컵라면 식사, 왜 띄워주는지 봤더니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3월 31일 유세가 끝나고 한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지난 3월 31일, 선거 유세가 끝난 뒤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모습이 포착돼 화제를 모았습니다. 국민의힘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리꾼이 한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과 글을 많은 언론들이 받아 쓰더군요. "그 긴 시간 지원 유세하시고 드시는 게 컵라면과 제로 콜라", "본인이 들고 가서 국물 따로 버리시고 분리수거 하시는 거 보고 이분 진짜 뭐지 싶더라", "오늘 점심도 달리는 차 안에서 김밥 드셨다고 하시더라" 등등 한 위원장을 안쓰럽게 보는 지지자의 말도 그대로 기사 속에 실렸습니다.

<한동훈, 서울·경기 유세 마친 뒤 컵라면으로 끼니 해결 모습 포착>(세계일보), <"겨우 먹은 게 컵라면과 제로콜라" 한동훈 편의점 포착> (이투데이) 등등의 제목에는 솔직히 묘한 불쾌감까지 들었습니다. 한 위원장이 바빠서 그렇게 먹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에게 바쁨은 한시적일 뿐입니다. 또 컵라면 말고 고급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는 분이죠. 컵라면 식사를 안쓰러워할 이유도, 띄워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이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컵라면이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라면은 뜨끈한, 든든한, 계란이나 파도 들어가고 밥도 말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한 그릇 음식' 같은 느낌이라면 컵라면은 '간편성'이 좀 더 중시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컵라면이 고급화되고 맛있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선 컵라면은 '먹는' 것이 아니라 '때우는' 음식이라는 개념이 강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먹고 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먹는 일, 즉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만은 아닐 겁니다. 일을 하다가, 혹은 하고 나서 숨을 돌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사람과의 교감을 나눌 수도 있고요. 컵라면은 너무나 빠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한 끼 식사라기에는 많이 아쉽습니다.

도둑맞은 가난
 

2016년 5월 28일,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씨의 소지품. 컵라면과 나무젓가락, 작업 공구 등이 들어있다. ⓒ 유가족 제공


"컵라면과 삼각김밥은 물질적 빈곤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적 빈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일하고 힘들면 밥 하나는 제대로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무리 가난해도 다 있다. 6000원짜리 국밥이라도 든든하다. 하지만 작업장을 나와 가게에 들어가서 주문하고 음식 기다리고 먹을 시간이 없다면 주머니에 10만 원이 있어도 소용없다."

2018년 12월, 당시 맥도날드 라이더로 일하고 있던 정훈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겨울철 허기 달래기에 컵라면 만한 음식이 없다고 하면서도, 당신은 강조합니다.

"3분짜리 음식은 우리의 삶을 간편하게 바꾸는 게 아니라 숨 막히게 한다." 

돌아보니 그해 여름 정훈님은 "올해는 컵라면 말고 폭염수당을 주세요"라는 내용으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2017년엔 더운 여름 고생했다며 라이더들에게 컵라면과 사탕 등을 나눠줬던 맥도날드 측에, '(올해는) 컵라면 대신 폭염수당 100원(1건당)을 달라'라고 외친 게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컵라면과 사탕 등이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는 사실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시간이 촉박한 이들을 더더욱 굴레에 가둬두는 듯한 느낌이니까요.

2016년 5월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사망한 김군의 가방에는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컵라면은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사망한 김용균씨의 유품이기도 했습니다. 식사 시간이 보장되지 않던 그는 컵라면을 작업장 대기실에 두고 허기를 달랬다고 합니다. 2019년 11월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유품에도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습니다. 

부자들도 컵라면을 먹습니다. 제주 한라산이나 스위스 융프라우에서도 컵라면을 먹습니다. 그건 '별미'이고 '재미'지요.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건 선택이 아닙니다. 바쁜 와중에 그나마 빠르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게 컵라면 혹은 삼각김밥뿐인 겁니다. 
 

2016년 10월 6일 자 <경향신문> 1면 ⓒ 경향신문

 
이제석광고연구소 이제석 대표가 2016년 10월 6일에 공개해서 화제가 된 경향신문 1면이 있습니다. 정말 신문을 깔고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은 듯 생생하게 이미지를 배치했습니다. 이 대표와 경향신문이 구의역 김군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이 지면의 오른쪽 하단에는 "오늘 알바 일당은 4만 9천 원, 김영란법은 딴 세상 이야기, 내게도 내일이 있을까"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쁠 때 컵라면을 먹은 이후에도, 그다음 끼니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한다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 반복되면, 정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요.

그래서 한동훈 위원장의 컵라면 사건(?)은 제겐 '도둑맞은 가난'처럼 느껴집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해진 이 말은 부유층의 '서민 코스프레'를 조롱할 때 주로 쓰이곤 합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줄 알았던 남자친구가 사실은 '가난 체험'을 하는 부잣집 아들임을 깨달았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시간을 쪼개서 컵라면을 먹고, 남은 국물을 버리며 분리수거를 하는,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칭송받을 일이 됩니다. 

한 위원장 스스로가 '컵라면 먹는 노동자'의 이미지를 탐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세상이 알아서 한 위원장이 컵라면 한 끼 먹은 것을 불쌍하게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단독] 대파 들고 서민 외치던 이재명, 저녁식사는 한우 전문점에서 … '컵라면' 한동훈과 대조>(뉴데일리)라는 기사까지 보게 됐습니다. 어쩌면 강남 8학군 출신에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그의 배경이 컵라면 식사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용기 없는 정치인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3월 31일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한동훈 위원장의 오늘 점심 식사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급하게 컵라면을 먹고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한 위원장은 선거가 끝나면 덜 바빠지겠지만, 노동자들은 언제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 끝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훈님 말대로 이들이 겪고 있는 '시간적 빈곤'을 해결하려면 비정규직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식사시간조차 보장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너무나 많습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22대 총선 전체 출마자 중 국민의힘 113명(44.5%), 더불어민주당 55명(22.4%), 개혁신당 13명(24.5%), 새로운미래 8명(20.5%)이 종합부동산세를 납부한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사각지대'가 잘 보일 리 만무합니다. 

'내 밥그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밥그릇', 더 나아가 '모두의 밥그릇'을 채워주는 일이 정치의 본령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하루 한 끼는 편하고 든든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정책과 법안이 있어야 하고, 이를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있고, 어쩌면 스스로와 당의 계급적 이익을 배반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그 용기를 가진 정치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컵라면 먹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또 이를 위해 22대 국회에는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사각지대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이게 만드는 일'을 해온 정훈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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