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2 11:55최종 업데이트 24.04.0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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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의료개혁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비장했다. 울지는 않았지만 울분도 느껴졌다. 소리치진 않았지만 그 자주 한다는 '격노'까지도 느껴졌다. 51분 동안 진행된 1만 1389자의 담화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읽혔다. 내용은 길었지만 메시지는 간명했다. 의대 정원 2000명은 자신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도출한 정답이며, 반대할 것이라면 과학적 근거를 갖춘 다른 정답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날의 담화는 세간의 예측을 비껴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예고되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정부 아닌 제3자가 의대정원확대 규모축소 or 연기 제안", "제2의 6.29선언처럼 '전격합의' 운운하며 선거용 쇼할 것"이라고 올리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들의 사직과 전공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여당의 지지율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자, 여권에서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돌파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가 넘쳤다.


그러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여권은 불안감을 쏟아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의사들이 합리적 대안을 가져오면 정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표현이 '기존 입장에서 물러난 파격적 양보'라고 해석한 모양이지만,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진실은 '우리도 못 말려'에 가까울 것이다. 담화가 갖는 진짜 의미는 의사들이 과학적 근거도, 통일된 안도 없으면서 집단행동을 해서 '우리 사회의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물론 윤 대통령의 담화는 근래 보기 드물게 타당하고 합리적인 주장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의료 현실의 문제나 전망, 국제 비교를 통해 파악한 의사 부족 실태, 부족한 의사의 추계 등은 많은 전문가의 손을 거친 흔적이 역력하다. 별다른 설득력도 없이 국민적 비호감도만 높인 의료계의 반발에 비한다면, 훨씬 훌륭한 점수를 줄 만하다.

그러나 담화의 논리적 타당성과 의대 증원의 정당성과 별개로, 윤 대통령의 담화는 그가 현 시국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측하게 해줄 몇 가지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주위 비판은 개혁의 걸림돌?

여권의 요구처럼 적절한 타협과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보다 정면 돌파를 선택한 윤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긴 담화문에 끼어든 한 줄의 문장에 힌트가 있다.

"지난 27년간 국민의 90%가 찬성하는 의사 증원과 의료개혁을 그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총선에 즈음한 윤석열 대통령의 담화는 여당의 총선승리보다, '그 어떤 정권도 해내지 못한' 개혁을 성공시킨 대통령,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자신의 목표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울분의 담화에 사족처럼 붙여진 말은 그가 의대 증원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행정절차법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친절한 해설에 이어 화물연대 집단 운송 거부 사건, 건설노조와의 갈등, 건전재정 기조, 한일관계 개선, 늘봄학교 추진, 원전 정상화 등 주위의 강한 반대에도 밀어붙였던 일련의 사안들을 열거한다.

문제는 그것의 해석과 평가다. 화물연대, 건설노조와 타협하지 않아서 건물과 산업시설 건설의 엄청난 차질과 경제와 일자리의 악영향을 막을 수 있었다거나, 참모의 반대에도 건전재정을 밀어붙여 물가를 겨우 2~3%로 방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만 명의 한일 관광객 증가는 자신의 한일관계 개선 노력 때문으로 평가한다. 늘봄학교는 사교육 카르텔을 혁파한 것이 되고, 원전 정상화는 산업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일이 된다.

주위의 의견을 듣거나 따르지 않아 외려 큰 피해를 막거나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는 이상한 확신은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위의 비판은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독선적 인식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의사들의 반발은 개혁의 성공을 돋보이게 해 주는 '과정의 고통'이 될 뿐이다. 독단과 독선, 뚝심이 오묘하게 뒤섞인 사고방식이 지금 윤 대통령을 지배하고 있다.

총선 후,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는
 

시민들이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TV 모니터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 개혁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주위의 숱한 반대와 강렬한 저항에도 개혁을 성공시킨 대통령,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여당과의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담화에서 윤 대통령은 여당의 총선승리보다(심지어 차기 대선보다) 역사적 대통령이 되는 자신의 목표가 더 우선순위에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돌이켜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가 될 고민도 했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에게 국민의힘은 대통령을 만들어 줄 수단일 뿐이었다. "공직 생활을 할 때부터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는 발언은 설령 여소야대 국면이 계속 이어지더라도, 당을 위한 타협이 자신의 목표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따라서 단지 여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정책 중 가장 국민적 지지를 높게 받았던 의료 개혁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많은 이들이 의료 개혁이 총선용 정책이라 비판했지만, 사실 윤 대통령의 그림은 총선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갈등의 조짐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장 대통령만큼의 의료 개혁 의지는 없어 보이는 여당 의원들은 대담 직후 다양한 불만을 쏟아내고, '국민의 요구'라는 모호한 말을 빌려 양보를 촉구하기도 했다. 함운경 후보처럼 대놓고 탈당을 요구하는 일이 아직은 드물지만, 궁지에 몰린 후보들이 또 어떤 목소리를 낼지 모를 일이다.

주목할 것은 조금씩 대통령실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행보다. 한 위원장은 지난 3월 31일 선거 유세에서 총선 이후 윤 대통령에게 쫓겨날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을 의식한 듯 "총선 이후에도 제 역할을 하겠다"며 "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과의 갈등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저희 사이좋습니다'라거나, '헛소문'이라고 일축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만만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갈등이 실재하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현재 권력의 성공에 집착하는 윤 대통령과 미래 권력에 깊숙한 이해관계를 가진 한동훈 위원장은 어느 순간 결별할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둘 중 하나가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야당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

논리적 정당성으로 무장한 대통령의 독선이 외려 개혁을 더디게 만들고, 여당은 지지율에 급급해 자중지란에 빠지고 있다면 의료 개혁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는 야당의 태세가 아쉽다. 이번 총선이 윤석열 정부의 중간평가이며, 정권 심판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의료 개혁이라는 국민적 과제에 총선 유불리만을 고려한 평론가적 입장이나 트집 잡기 수준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담화에서 언급한 한국의 의료 현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고, 의료 개혁의 필요성은 의료 현장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대 어느 정부도 정치적 유불리 셈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렇게 방치되어, 지금처럼 절박한 상황까지 온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지적은 인정하기 싫더라도 사실이며, 가슴 아프게 새겨야 할 평가다.

이런 가운데, 더불어민주연합 의료개혁특위에서 '민·의·당·정 의료개혁 4자협의체'와 의료개혁 10년 로드맵을 제안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혼란을 조속히 마무리 짓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사단체 등 갈등 당사자만이 아니라 국민과 정당 등 더 넓은 주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의대 정원 문제에 가려진 의료 개혁 과제를 점검하는 것도 미룰 수 없다. 의대 증원이 목표대로 되더라도 가뜩이나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된 마당에 당장 이공계의 의대 쏠림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고, 확대되는 인원수만큼 공공의료의 공백을 확실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인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의도는 정당하고 방향은 옳으나 독선적 방식이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더 잘할 수 있는 대안을 보여줘야 한다.

대안 없는 비판과 묻지마 심판은 환호 뒤에 절망이 뒤따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 사례가 적지 않다. 남일 보듯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총선 승리가 목표가 아니라, 승리 뒤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전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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