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3 15:11최종 업데이트 24.04.0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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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받은 제주도 택시운전 자격증. ⓒ 김지영

 
제주에서 7년을 살았다. 2010년 섬에 들어갔다가 2017년 육지로 나왔다. 그땐 아이들도 어렸고 아내도 나도 젊었다. 처음 3년은 동쪽 시골 언덕 위 하얀 집에서 더 이상 바랄게 없는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태우고 중산간 길을 달리던 아내의 차가 갑자기 나타난 노루를 피하다 노변 바위에 부딪힌 후 튕겨 나가버렸다.

큰 사고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중상자가 되어 시내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해서도 아내는 몇 년에 걸쳐 수술과 재활을 반복해야 했다. 행복했던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병원 가까운 제주 구시가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제주에는 회사라는 것도 별로 없고 생리에 맞지 않는 회사 생활이 싫은 나는 아이들을 챙기고 아내의 재활을 도우며 건설목수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 왔고 현장 일은 들쭉날쭉이었다. 마침 개인택시를 하는 지인이 법인택시도 열심히만 하면 목수 일당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했다.

제주 겨울은 명목상 온도는 영상이라도 사방팔방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춥고 시린 날이 많았다. 바람이 심하면 멈춰야 하는 들쭉날쭉한 현장과 시린 겨울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다 싶어 냉큼 택시운전자격증을 따서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5분 교육 받고, 제주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다
 

제주에서 운전했던 택시 안 풍경 ⓒ 김지영

 
2015년 겨울이었다. 그 해 포털 다음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해외입양인의 삶과 사랑'을 14회까지 쓰고 마무리 한 후였고 2016년 출판 계약을 맺은 책 원고를 손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글을 쓰면서 두드렸던 망치를 내려 놓은 대신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오기까지 운전대를 잡을 생각이었다.

면접을 봤던 회사 상무란 사람이 내게 배정된 택시 키를 내주면서 말했다.  

"이십대 때 택시 몰아봤다고 했죠?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건 없으니 잠깐 미터기 작동법만 설명 드릴께요. 손님이 타면 이걸 누르면 되고 내리면 이걸 누르세요. 다른 건 해보시면 알아요. 모르면 다른 기사들한테 물어보시고요."

교육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십 년 전 했던 3개월 스페어 택시기사 경력 덕분에 오 분 남짓한 시간이 내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그 길로 회사 주차장을 빠져나오긴 했는데 막상 영업을 시작할 순간이 오자 두려운 마음에 심장까지 떨려와 큰길 앞에서 한참 숨을 골랐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하는 일 앞에서는 그렇게 된다. 더군다나 매번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이다.

제주에 와서 첫 한 달을 혼자 중산간 외딴집에서 살았을 때였다. 읍내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깜깜한 밤길에 가로등은 없고 비포장도로 양쪽으로 억새가 사람 키만큼 자라있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억새밭에서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올까 싶어 매번 무섬증이 일었는데 가장 두려웠던 건 동물보다 (누군지 모를)사람이었다. 경우에 따라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로등도 있고 억새밭도 아닌 아스팔트 길이지만 그래도 택시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태워야 하는 일이었다. 큰길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어? 육지사람인가 보네?"
"네. 육지것입니다."
"하하하"


제주 사람들은 내 인사말 안에 담긴 단어와 억양만으로 내가 육지것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아냈다. 그리고는 내비게이션보다 더 친절하게 지름길이나 전통적인 동네 이름을 알려주곤 했다.

5분 교육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해보면 알아진다는 상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며칠 만에 나는 택시에 익숙해졌고 미터기 사용법을 터득했으며 내 택시를 타는 제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야간에 벌어지는 주취자의 만행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밤이 되면 벌어지는 인간사의 추한 장면 중 하나다.

지인의 말대로였다. 법인 택시였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니 사납금을 내고도 목수 일당만큼 돈이 벌렸다. 하지만 택시는 기본적으로 손님이 있어야 운행이 되는 구조이다 보니 내가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겨울나기 목표였던 5개월 동안 짧았지만 꾸준하게 손님을 태울 수 있었던, 육지와는 다른 제주도만의 택시 문법이 따로 있었다.

불편한 대중교통, 여행객... 그리고 술과 괸당
 

2015년 당시 제주도 시내 밤거리 풍경. 제주의 저녁은 중심가를 벗어나면 거리는 한산해진다. ⓒ 김지영

 
70만이 사는 제주도 면적은 천만 서울의 3배다. 인구밀도가 매우 낮긴 한데 제주도 인구의 70%가 제주시에 살기 때문에 시내 밀집도는 매우 높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도 교통체증이 있고 시내 주차 시비는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반면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속이 뻥 뚫리는 도로와 적도스러운 자연을 마주치게 된다.

즉 인구밀도가 높은 시내권과 낮은 시외권의 짧은 구간거리와 서로 다른 대중교통 수요가 공급 체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런 특성은 효율적인 대중교통 체계에 구멍을 내고 그곳을 택시가 메꾸는 형국이다. 8년 전에는 그랬다. 첫 번째 문법이다.

택시와 관련된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제주에는 크고 작은 유흥가를 모두 수렴하는 음주가무의 3대 성지(?)가 있다. 신제주 재원아파트 사거리, 구제주 시청, 동쪽으로는 인제수협사거리가 그곳이다. 특히 제주도의 깊은 밤은 유흥가만 아니면 일찍 잠드는 거리여서 적막감과 함께 모든 도로가 한산해진다.

해서 성지순례를 마친 유흥객들이 서둘러 택시를 타고 떠나는 시간이 되면 적막하고 한산한 길 위로 택시들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제주도의 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 시간 빨간 빈차등을 켠 택시들이 세 곳의 유흥가로 모여들었다가 취객을 태우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행렬이 암흑을 가를 것이다. 이어 가까운 시외에 손님을 내려 준 빈택시들이 포뮬러 경기장을 질주하듯 시내로 모여드는 광경은 장관이다. 이런 심야 왕복을 몇 차례 했는지가 그날 매출의 관건이다.  

두 번째는 여행객이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1970~80년만 해도 가장 많이 찾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고 비행기에서 내린 신혼부부는 여행 기간동안 대절한 택시를 타고 관광을 했다.

1990년대 결혼한 나도 그런 문법에 따라 제주에 가서 택시를 대절했고 택시기사가 내려 준 관광지를 구경하고 사진도 택시기사가 선택한 배경에 택시기사가 주문한 자세로 찍었는데 사람만 바뀐 똑같은 사진을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집에서도 흔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제주도는 여행자의 섬이다. 택시관광 대신 렌터카 여행이 대세가 되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레길이나 한라산 등반 등의 이유로 대중교통 여행을 한다. 차가 있는 여행객들도 저녁에는 숙소에 차와 짐을 풀고 제주시내를 즐기기 위해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 산업의 관점에서 관광객 수요는 육지에서는 변수로 작용하지만 제주에서는 상수다. 이 점이 육지와는 다른 제주택시만의 장점이다.

마지막 문법은 술과 괸당이다. 제주에서 7년을 살면서 제주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육지것과 제주사람의 차이가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사람들은 대개 투박하고 진실됐다. 그리고 '찐' 제주토박이들은 한결같이 '말술'을 마셨다. 거기에 괸당문화가 한 술 더했다.

친인척의 제주도 방언이 괸당이고 괸당 중심의 문화가 제주인들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탐구는 학자들의 몫이지만 택시기사 입장에서 괸당을 말하자면 참말 고마운 문화다.

왜냐하면 제주 사람들 일상 안에 괸당문화는 많은 모임을 만들어냈고 많은 모임은 많은 술자리를 만들어냈으며 많은 술자리는 불가피하게 많은 대리운전이나 택시를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은 정말 모임이 많다.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서부터 학교와 직장에 친인척 모임까지 매달 치러내야 하는 모임이 몇 개다. 육지 사람들도 그런 모임들이 있지만 섬 문화의 특성 때문인지 제주 사람의 자신을 낳은 땅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는 억지로는 끊어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괸당문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나는 잡았던 운전대를 놓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망치를 들었다. 제주에서 5개월 택시생활은 내게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금은 불편한 대중교통과 여행객과 술과 괸당문화 덕이었다.

덕분에 네 식구 생활비를 해결하면서 사람이 사는 섬의 구석구석까지 밟을 수 있었다. 제주에 살아도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제주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육지것이라는 이유로 택시운전사인 나를 환대해 주었다.

제주에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큰 사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었다. 아내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지만 다시 살아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택시를 그만둔 다음 해 이삿짐을 싸서 가족들과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오른 나는 후미에 서서 점점 희미해지는 제주도를 아쉬운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제주도는 계속 살아도 좋았고 계속 살고도 싶은 곳이었지만 점점 나이 들어가는 나와 아내에게도 가까이 사는 괸당이 소중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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