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6 15:47최종 업데이트 24.03.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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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혁신당 대전광역시당이 지난 24일 오후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조국 당대표는 "윤석열 정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파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조국혁신당이 비례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달 3일 창당된 이 당은 18일 보도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26.8%를 기록해 국민의미래(31.1%)에 이어 2위에 올랐고(주석 1), 25일 보도된 리얼미터 조사에서 27.7%를 기록해 국민의미래(29.8%)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2).

만약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도 아닌 조국혁신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많이 확보한게 된다면, 이는 비례대표제를 한국에 도입한 사람들의 구상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비례대표제 악용한 박정희 

과거에 '전국구'로 불린 비례대표제도는 득표율을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하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는 등의 취지를 띤다. 민주적 취지를 갖는 이 제도를 국내에 도입해 지극히 비민주적으로 활용한 쪽이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은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이 제도를 다수당의 폭주를 돕고 소수당의 등장을 견제하는 쪽으로 역이용했다.


1963년 11월 26일의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1961년 5·16 쿠데타로 해산된 국회를 새로 구성하는 기회였다. 그해 1월 16일, 비상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하고 당일부터 시행했다. 이 법 제13조는 "의원의 선거구는 지역선거구와 전국선거구의 2종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비례대표제가 한국에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법 제125조가 정한 전국구 의석의 배분 방식은 제도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제125조 제2항은 "제1위로 득표한 정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이상일 때는 각 정당의 득표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한다"고 규정했다. 제1당이 지역구에서 50% 이상을 득표했을 때는 각 당의 득표율에 따라 비례 의석을 배분하기로 한 것이다. 뒤이어 제3항은 이렇게 규정했다.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미만일 때에는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하고 잔여 의석을 제2당 이하의 정당에 득표 비율로 배분한다."

제1당은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해도 전국구 의석 절반을 무조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나머지 정당들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받도록 하면서도 제1당에만 비합리적인 특혜를 줬던 것이다.

제15조는 "전국구의 의원 정수는 지역구에 의하여 선출되는 의원 정수의 3분의 1"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지역구에는 141석, 전국구에는 44석이 배당됐다. 전국구가 44석이나 됐기 때문에, 제1당이 유력시되는 민주공화당이 50% 득표에 실패하더라도 전국구 22석을 차지해 과반수를 확보할 여지가 있었다.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당선된 뒤에 치러진 11·26총선에서 공화당은 33.5%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윤보선이 이끄는 민정당은 20.1%로 2위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전체 175석의 62.9%인 110석을 가져가고, 민정당은 22.9%인 40석을 가져갔다.

민정당의 경우에는 득표율과 의석 비율이 거의 일치하는 반면, 공화당의 경우에는 의석 비율이 득표율의 2배 가까이 된다. 소수 정당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제1당을 보호하는 제도로 악용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전국구 도입에 관해서는 총선 훨씬 전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1962년 12월 21일 자 <동아일보> 우단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인 이인은 전국구 도입을 바라는 국민 여론이 형성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혁명정부에서 비례대표제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혁명정부가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것은 얕은 정치적 저의를 엿보이고 있어 유감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기사에 나온 강문용 성균관대 교수와 이항녕 고려대 교수는 전국구 의석을 많이 두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강문용 교수는 "반수까지 가서는 안 되며 3분의 1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전국구 의석을 많이 늘려 과반수를 관철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중을 당시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발언들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원대 복귀하겠다는 애초의 약속과 달리, 민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직면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기성 정치인들에게 제약을 가한 이들은 민정 실시에 대비한 정치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징꼬사건 같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이는 4대 의혹 사건으로 불리며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해 둔 상태에서 민주공화당 창당을 은밀히 추진했다. 공화당 사전 조직 혹은 비밀 창당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원대 복귀 약속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들이 반칙을 일삼는 집단임을 보여줬다. 거기다가 박정희 정권은 식민 지배 청산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짓밟고 대일 굴욕외교까지 추진했다. 

민심이 박정희 정권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현상으로도 증명되고 있었다. 박정희의 우군인 군부 안에서는 툭하면 '반혁명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의 민정 추진에 실망한 혹은 박정희에게 도전하는 군인들이 일으킨, 또는 박정희가 군부 내 정적을 숙청하고자 일으킨 반혁명 사건은 대략 10건 정도나 된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역모 사건이 빈발했다는 것은 그것이 진짜든 조작이든 박정희의 입지가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군인들이 동요한 것은 이들이 민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국민들은 물론이고 군부도 믿기 힘들어 하는 이 같은 상황이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미만일 때에는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한다는 선거법 조항의 신설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앞날에 대한 박정희의 불안감이 비례대표제를 한국에 들여오는 결정적 요인이었던 셈이다.

1963년 총선은 박정희 정권이 제3공화국을 여는 준비 작업이었다. 새로운 공화국의 정치 지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편법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전국구 제도가 나왔다. 한국의 비례대표제 도입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수당 이익 위해 운용된 비례대표제 역사, 변화 생길까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미디어 공용

 
1963년 총선에서 도입된 전국구 제도는 1967년 제7대와 1971년 제8대 총선 때도 유지됐다. 공화당은 1967년에 175석 중 129석을, 1971년에 204석 중 113석을 차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제9대와 1978년 제10대 때는 이 제도를 활용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이들을 형식적으로 선출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비례대표제를 굳이 시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인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사실상 국회의원선거가 올바로 시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전국구 제도(6대~8대)나 국회의원 3분의 1 추천제(9대·10대)가 등장해 집권당의 과반수 획득을 가능케 하곤 했다.

'부정선거' 하면 이승만 정권부터 연상하게 된다. 박정희 집권기에 부정선거 시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선거법 자체가 위와 같이 제1당에 지나치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부정한 선거'보다 '부정한 선거법'이 더 문제였던 셈이다.

박정희 못지않게 탐욕스러웠던 이승만 정권은 '이상한 전국구' 같은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948년 제1대 총선과 2년 뒤의 제2대 총선에서는 절대 다수당이 배출되지 않았다. 두 선거에서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1948년에는 200석 중 55석을 차지한 대한독립촉성회가 제1당이 됐고, 1950년에는 210석 중 24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이 제1당이 됐다.

굳이 비례대표제를 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 총선에서는 소수당들이 의회에 많이 진출했다. 그래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여론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이승만의 절대 권력이 구축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집권세력이 '이상한 전국구' 발상을 내놓기도 힘들 때였다.

이승만이 한국전쟁(6·25전쟁)을 계기로 절대 독재자로 변모한 뒤에 치러진 1954년 제3대와 1958년 제4대 때는 여당인 자유당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1954년에 자유당은 득표율 36.8%로 전체 의석의 56.2%인 114석을 차지했다. 1958년에는 득표율 42.1%로 전체 의석의 54.1%인 126석을 획득했다.

1954년·1958년 총선 때 자유당의 지역구 의석은 지역구 득표율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 같은 과잉대표는 이승만 정권이 박정희 정권처럼 머리를 회전시킬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이승만 정권에 유리했다.

박정희 이래로 한국의 유력 정당들은 비례대표제를 소수정당이 아닌 주요 정당들의 이익을 위해 운용했다. 위성정당을 두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모습은 그런 구태가 아직도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국혁신당의 활약이 그런 구태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① 3월 11-15일, 전국 만 18세 이상 2504명 대상, 무선(97%)·유선(3%) 자동응답 방식, 응답률 4.2%,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2.0%포인트
② 3월 21~22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4명 대상, 무선(97%)·유선(3%) 자동응답 방식, 응답률 4.3%,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오차 범위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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