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4 09:45최종 업데이트 24.03.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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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라이더유니온 조직국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박정훈 기자님의 편지를 읽고 기자님이 저와 이준석을 인터뷰한 2012년이 떠오르네요. 당시 이준석은 박근혜 키즈로 불렸고, 저는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준석과는 동갑내기인데, 12년이 지나도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아 어쩐지 안심이 됩니다. 평소 그의 말투를 떠올려보면 '웬 듣보잡이냐'고 할 것 같지만 말입니다. 

이준석은 당을 만들고 경기 화성을에 출마했다는데, 저도 출마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안 불러주더라고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에 도전해 당선됐습니다. 작은 조직에서만 일하다가 25만 조직의 임원이 되어 떨리기도 하고 잘 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합니다.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전화를 돌리다 보니 어김없이 '박정훈'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화물연대 조합원이셨습니다. "제 이름도 박정훈입니다"라고 했을 때 크게 소리 내 웃으실 줄 알았는데 어색해 하셔서 조금 민망했습니다. 사실 웃을 일이 없는 요즘입니다. 화물연대는 노동법 밖으로 추방된 화물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윤석열 정부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인지,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는 노조입니다. 그 결과 화물노동자들을 지키고 있던 안전운임제가 폐지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겠다면서 비정규직 노조를 탄압하는 이상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기획이 황당한 이유 
 

<조선일보>와 전태일재단 공동기획 기사 2024.3.5. ⓒ 조선일보 PDF

 
요즘 화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전태일재단과 함께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심층 분석하겠다며 이번 달부터 기획기사를 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비난했던 <조선일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황당해했습니다. 내용이 옳으니 메신저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작가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며 노조를 꾸짖는 교수님도 보입니다.

정작 문제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비정규직, 특고, 플랫폼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삭제됩니다. 민주노총 내 비정규직 비율은 계속해서 높아졌습니다. 가열찬 투쟁을 벌이는 곳도 대부분 비정규직 노조입니다. <조선일보>가 민주노총을 비난하기 위해 열심히 기사를 쓰면 쓸수록 신문 지면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이유입니다. <조선일보>는 캔 커피를 캔맥주라고 우기며 쿠팡물류센터 노동자들이 농성장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오보를 내고,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의 투쟁에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관련기사: 나는 조선일보가 지지난 여름에 낸 사설을 알고 있다https://omn.kr/27o7v)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필요한 노조법 개정도 나라 경제가 파탄 날 거라고 비난했습니다. 우리와 이름이 똑같은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실장이 어김없이 등장해 노조는 괴물이라고 외칩니다. 정부와 <조선일보>는 불쌍하게 보이는 노동자들은 보호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비정규직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면 탄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니 정규직 노조가 정신 차리라는 기사를 낸 것일까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흉이 정규직이니 임금체계를 개편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러나 이번 기사에서 <조선일보>가 자랑한 조선소 상생협약을 맺은 삼성중공업은 하청노동자 임금 70억 원을 체불했습니다. 원청이 필요한 돈을 하청에게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이 떼입니다.

임금체불이 자주 벌어지는 건설 산업에서는 하청 건설노동자들이 원청에 임금체불의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무려 근로기준법 44조의 2, 3에 법률로 들어가 있는데, 건설노동자들이 치열하게 투쟁한 결과입니다. 정부와 <조선일보>가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겠다면 이들 노조를 칭찬하고 다른 산업에서도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법안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노조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은행과 정부 주도 하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적용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아마 10년쯤 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노조 때문이라는 기사가 나올 겁니다. 사실 노동시장 이중구조도 옛말입니다. 기업은 필요에 따라 플랫폼, 특수고용, 프리랜서 등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노무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다중구조라고 해야 적확합니다.  

<조선일보>도 언론사라 현실 왜곡만으로 공격하기 쉽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불러 정규직 노동자 공격을 위한 들러리로 세워야 하는데, 정작 비정규직들은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투쟁해서 싸우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겠지요. 그렇다고 정부와 <조선일보> 입맛에 맞는 조직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개인'과 '서사'를 찾습니다. 노조 소속은 아니지만 생생한 이야기를 해줄 개인을 발굴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죠. 라이더유니온 초기에도 언론으로부터 비슷한 요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라이더유니온 로고를 삭제하거나, 노조 티가 안 나게 말할 사람을 섭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요. 배달복장을 하고 등장하면 미소 짓고 사진을 찍지만, 노조조끼를 입고 나타나는 순간 미소는 일그러지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뀝니다. 

전태일 들러리 세우는 <조선일보>
 

종로구 청계천 버들다리(전태일다리) 위에 있는 전태일 동상.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22세의 나이에 분신했다. 2023.11.12 ⓒ 연합뉴스

 
기자님은 지난편지에서 호명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배제된 존재들에게 배달된 초대장을 꼼꼼히 읽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립적인 메신저가 아니라 누구에게 초대장을 보낼지 결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야기를 편집하는 적극적 행위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호명을 받은 몇몇 개인들은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설렙니다. 공동체의 지지보다 중요한 게 SNS의 좋아요와 출판계, 방송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기자님이 말씀하신 각자도생의 모습은 담론 형성과 문제해결 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조선일보>의 초대장에 전태일재단은 응했지만, 비정규직 특고 플랫폼 노조들은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각자의 서사를 우리 모두의 서사로 만드는 작가가 바로 노조입니다. 집필의 과정은 괴롭고 지리 합니다. 반나절의 시간을 들여 의견을 모으고, 각자의 사연을 인터뷰하고 실태조사를 하는가 하면, 관객과 주인공이 되어 집회무대를 만듭니다. 슬로건 문구 하나로 싸우기도 하고, 삶이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연대하기도 합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단단한 공동체의 힘으로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해 동지들을 불러 모읍니다. 스스로의 힘이 있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니 들러리로 세우기 힘듭니다.

반면, 전태일은 <조선일보>의 배경이 됐습니다. 전태일을 사유화하고 일부 사람들의 네트워크로만 활용된다면 전태일 역시 떠나보내야 합니다. 전태일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반드시 전태일재단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전태일은 <조선일보>나 재단이 아니라 노동자가 매일매일 출근하는 노동 현장, 전태일처럼 실천하는 농성장, 그가 꿈꿨던 노조에서 호명되어야 합니다.

진보정치의 현실도 이와 같지 않나요? 

참담한 것은 지금의 정치현실, 특히 진보정당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겠다고 하는데, 스스로의 힘을 키울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이재명, 조국, 이준석 앞에 줄을 서서 그들로부터 이름이 불리지 못할까 전전긍긍합니다. 함께 했던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사람들로부터 호명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4월 총선과 그 이후 진보정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입니다. 기자님은 마음은 어떠신가요?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님께 정치에 대해 묻는 것만큼 나쁜 짓은 없어 보입니다만 답답한 마음 둘 곳 없어 여기에나마 놓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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