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31 16:52최종 업데이트 23.10.3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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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지역 및 필수 의료 혁신 이행을 위한 추진계획 관련 브리핑을 시작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19일 발표된 '필수의료 혁신전략(이하 혁신전략)'에 의대 정원 확대 추진 계획이 포함되었다. 당초 1000명 이상 입학 정원을 늘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의사집단의 반발을 의식한 탓인지 구체적인 증원 규모는 제시하지 않은 채 단계적 증원 방침을 밝혔다.

근래 들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사태 등이 이슈화되면서 의사인력 부족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높아진 상태다. 대다수 시민들이 찬성하고 있는 만큼 정부와 여당은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적극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일각에서는 선거용 공약(空約)에 불과하다거나 지난 2020년처럼 의사 집단 파업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온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글에서는 정책 추진을 전제로 의대 정원을 어떻게 확대해야 할 것인지 논의하고자 한다.

지나치게 시장적인 한국의 보건의료체계    
 

지난 17일 대한의사협회가 서울 용산구 의협에서 연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에서 이필수 의협 회장이 인사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글(필수의료 공백, 수도권과 대도시도 안전하지 못하다 https://omn.kr/24hi3)에서 주장한 것처럼 필수의료 인력 부족 문제에는 총량과 분포의 문제가 중첩돼 있다. 단순히 의사 배출 숫자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처럼 지역과 진료 과목별 의사인력 분포가 편중·왜곡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의 보건의료체계가 지나치게 시장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서비스와 재화는 돈의 논리에 따라 생산·공급·분배되기 마련이다. 의료서비스 공급자인 의사 입장에서 볼 때 노동 투입 대비 보상이 낮은 필수의료 영역을 기피하는 건 경제적 주체로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지금의 필수의료 위기는 시장형 보건의료체계에 따른 필연적 귀결로 볼 수 있다.

한데 필수의료와 관련된 주류 정책적 논의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식이 결여돼 있다. 이번 '혁신전략'에서도 하위체계에 해당하는 의료전달체계, 진료비 보상체계 개편 정도가 짤막히 언급되었을 뿐, 보다 상위체계 차원에서의 시장화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는 보건의료는 시장에 속한다는 대전제 하에서 대안을 찾고 있다는 의미다. 

의대 정원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정부와 의사 집단 모두 구체적 수단만 다를 뿐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문제 해결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한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장형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시장실패에서 기인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물론 획기적으로 의사 수를 늘리거나 수가를 인상한다면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 투입되어야 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생각한다면 큰 폭의 변화를 추진하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정부는 재정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국가 책무를 다했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선에서 의사들과 정책적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더 큰 한계는 이러한 체계 내적 접근으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주한 복합위기 속에서 점차 심화되고 있는 필수의료 위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30년 전 상황이었다면 의사 공급 확대나 경제적 보상 강화와 같은 정책만으로도 어느 정도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전례없는 저출생과 수도권 집중화 문제로 인해 지역소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 결과 비수도권 비도시 지역의 보건의료시장은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종합병원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배후 인구'마저 사라진 지자체들이 이미 수두룩하다. 아무리 의사 수를 늘리고 유인책을 쓴다 해도 시장이 사라지면 시장 메커니즘은 무의미해진다.

그동안은 권역·지역 책임의료기관과 여러 전문진료센터를 설치·지정하여 이들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응급환자 이송·의뢰체계 구축과 연계·협력 네트워크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하지만 협력의 비강제성과 지리적 접근성의 한계 등을 차치하고서라도 정부의 불충분한 지원과 환자유출 등으로 인해 지역 거점병원들 역시 기대 역할을 수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필수의료 위기는 보건의료체계를 둘러싼 거시적인 사회구조의 변동과 맞물려 촉진되고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체계 내 일부 제도와 정책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필수의료 공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계의 시장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즉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공공성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차원적 개념으로, 쓰이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보건의료에서 공공성은 주로 '양질의 보건의료'에 가까우며, 현재 보건의료의 문제점이나 '영리형 의료'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김창엽, <건강의 공공성과 공공보건의료>, 2019).

쉽게 말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란 모두가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번 정부에서는 전임 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해서인지 공공성 용어의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보인다. 하지만 보건의료는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필수 사회서비스이자 공적 재화로서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일 수밖에 없다.

'혁신전략'에서 비전으로 밝힌 "언제 어디서나 공백없는 필수의료 보장"이라는 것도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부가 지금 추진하려고 하는 의대 정원 확대 정책 역시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더 정확히는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의 일환으로 이뤄져야 한다. 

의대 정원 확대, 공적 주체가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지난 5월 2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공공의대 신설과 의대 정원 확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먼저 정책결정 과정에서 민주적 공공성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의사 증원 문제는 의정협의체라는 폐쇄적·배타적 논의구조에서 다뤄져왔다. 그러나 이 문제에 걸려있는 가장 큰 '판돈'은 의사들의 의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이다.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를 논의에서 배제시킨 것은 절차로서의 공공성을 위배하는 것이다. 

지난 26일, 복지부는 의료현안협의체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의대정원 확대 규모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두 논의기구 모두 정책관료와 의료전문가 위주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다양한 형편과 처지에 있는 시민들의 참여 비중을 높이는 가운데 특히 필수의료 공백 문제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대표성을 반영하는 논의구조를 갖출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정책 내용으로서의 공공성 강화가 중요하다. 현재 증원의 구체적 방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단순히 기존 의대 정원을 골고루 늘려주는 방식으로는 체계의 시장성을 약화시키기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사는 지역을 떠나지 않으면서 노동 강도가 비교적 높더라도 생명과 건강 보호에 필수적인 의료 분야에서 꾸준히 종사할 수 있는 공공의사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국립의대가 아니라 특수목적의 공공의과대학을 신설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시장 메커니즘으로는 의사 인력을 지역과 필수의료 영역에 묶어두기 어렵다. 최근 시도된 공중보건장학제도나 공공임상교수제 역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자치의과대학처럼 졸업 후 일정기간 의무복무(9년)를 조건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공공의대 설립을 그 대안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체계의 공공성 강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공의대 설립·운영의 목표는 필수의료 전공 의사 양성과 지역 의무복무에 국한돼서는 안 된다. 공공의대에서 양성된 의사들이 보건의료의 공공성 강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임상과 연구 활동 등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과 수련시스템을 갖추고 졸업 이후 '경력경로(career path)'까지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해당 광역지자체에 공공의사 면허 발급과 관리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법·제도를 개편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사 면허의 지역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의사 집단의 상당한 반발이 예상되지만, 이러한 제도적 통제 장치가 없다면 갈수록 악화되는 지역불평등 구조로 인해 의사인력의 유출을 막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파격적 대안들을 정부가 채택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더 큰 관심은 보건의료를 산업으로 육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필수의료 강화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보건의료 영리화·상업화를 적극 추진 중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외면한 채 영리기업들이 건강·보건의료 서비스 시장을 넓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이번 계획에 '혁신'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대개 '혁신전략'이라고 하면 바이오헬스 산업 등의 육성과 관련해 사용되는 표현이다. 산업 활성화를 위해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 규제를 무력화하는 의미로 통용되는 '혁신'을 '강화(지원)' 대신에 선택한 것은 필수의료 문제 역시 시장의 방식으로, 또는 시장화에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의대 정원 확대는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적 주체가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부와 의사 집단이 필수의료 위기 앞에서도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면, 절실한 시민들이 공적 주체로 적극 나설 수밖에 없다.

의사 집단의 반발에 정책이 후퇴하지 않도록, 또 정부가 많은 정치적·경제적 부담을 지더라도 실효성 있는 대안을 채택할 수 있도록 비판하고 견제하고 촉구하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사 증원 방식이 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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