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4 20:52최종 업데이트 23.08.2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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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이 일을 할 줄 몰랐었는데, 하다보니 사랑하게 되었다. 열렬하진 않다. 종일 원고와 씨름하고 퇴근한 저녁, 버릇처럼 책을 들여다보다가 낮에 본 그것과 닮은 글자에 몸서리치다가 잠들기 일쑤다.

인쇄소 일정이 촉박한 시기에는 읽던 책을 부러 덮어둔다. 언뜻 애독가처럼 보이겠지만 인터넷 서점과 도서관을 동분서주하며 더 읽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만 같다.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정확히 말하면 잡지 편집자다. 단행본, 사전, 신문 등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기획‧편집하고, 삽화를 그리고, 제작하고, 홍보하고, 판매하는 직업군이 있다).


십 년 정도 된 듯싶다.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매년 개정된 한글맞춤법을 숙지하고 사전을 끼고 일해도 종종 발견하는 오자에 얼굴이 빨개진다. 쥐구멍에 숨고 싶을 때가 부지기수다.

베테랑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자조하면서도, 품고 있던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 성취를 이루는 사람의 기쁨을 만날 땐 고요한 사무실에서 몰래 볼썽사납게 눈물을 훔치거나 담배를 태우며 기지개를 켠다. 홀로 빛나던 타인의 문장이 또 다른 타인의 감흥을 끌어낼 때는 개운하다, 살맛이 난다. 그런 순간들이 적다는 건 편집자로서 닦아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의미할까.

편집자, 책의 기미 상궁
 

▲ 책 <편집 후기> ⓒ 교유서가 ⓒ 최문희

 
"나는 그가 누구든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 하지 못하지만 그가 누구든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잘 듣는다."

<편집 후기> 초반에 나오는 대목이다. 편집자 오경철이 오랜 시간 문학책을 만들며 겪은 슬픔과 기쁨을 회고한 이 책은, 동종업계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일인 출판을 시작하지 말라는 조언 등 이따금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냉정한 저자의 경험담이 폐부를 찌른다. 하지만 그가 쓴 이야기를 마법처럼 계속 읽게 된다.

숭고하지 않은 편집 일에 관해 산전수전 겪어 본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끝내 숭고해서 앞서 말한 "그가 누구든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잘 듣고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희한한 일이다. 더 구체적으로 숨어 있되, 더 구체적으로 한 사람의 개성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듣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는 당연한 진리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니 말이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연습이 필요하다. 저자(필자)의 결을 파악하려면 꾸준히 소통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는 그의 말에서 행간을 더듬고 '책이 될 만한 이야기의 기미'를 찾아내야 한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문장의) 맛'을 식별하는 기미 상궁과 비슷하달까.

그들은 대체로 고요하다. 성향상 그런 면도 있지만 직업상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편집자의 공력을 드러내고자 책표지에 저자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싣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저자를 빛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자의 이야기만이 독자의 귀에 선명히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권위보다 이야기를 사랑한다.
 
"직업인으로서 편집자는 책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이다. 편집이라는 일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편집은 일의 속성상 일하는 사람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편집자는 자신이 일의 주체이면서도 어지간하면 자신이 주체임을 주장하려들지 않는다."
 
원고 갈피를 잡다가 때론 자기 삶의 갈피를 놓치는

빨간펜을 들고 책상에서 골몰하는 사람. 대체로 대중은 편집자를 이런 모양새로 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기도 틀린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했듯 "원고를 고치고 바로잡고 다듬는 일을 한데 묶어" 하는 일을 뜻하는 교정‧교열은 "(책) 제조의 기초 공정"이다. 이 작업을 하기 전 편집자는 '될 만한 이야기'를 발견하고자 꾸준히 시장을 탐색한다.

저자가 여러 날의 고투 끝에 원고를 보내주면 그에 걸맞은 삽화를 그릴 일러스트레이터와 일정을 조율한다. 신간을 홍보하는 마케터, '색의 마법사' 인쇄소 기장과의 소통을 마무리하고 도서 입고까지 완료하면 책이 잘 팔리도록 쓰는 글인 보도자료를 쓴다(저자도 이 일의 통증을 솔직히 고백한다).

보도자료를 쓰면서 온몸이 탈진하는 경험은 아마 어떤 편집자든 겪었을 것이다. 역시 고투 끝에 완성한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릴리즈)하고 인터넷 서점에 등록 요청하면, 비로소 책은 독자를 만난다. 그리고 도돌이표 달듯 이 과정을 반복한다.

오경철 저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책에서 상세히 풀어내며, "그러느라 삶의 갈피를 놓치기 일쑤"인 편집자는 "끼니를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듯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어지간히 잘해도 표가 나지 않는" 교정‧교열에 관해 "어지간히 잘하지 못하면 대번에 눈에 드러난다"는 뼈아픈 사실도 일러 준다.

그래서 편집자는 누구보다 꼼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다. 그런데 그러기 쉽지 않다. 꼼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노력에만 머물 때는 소주를 들이켜고야 만다. 일부 편집자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그러나 예민하기보다 적막한 사무실에서 때때로 다정한 회사원이 되고 싶은 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 ⓒ 고정미


저자가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겪었던 관행을 짚은 대목은 이 업계에서 일하고자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저자 가운데엔 인성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글에 털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는 외골수도 있다. 저자는 원고를 쓴 사람의 권위는 존중해야 하지만 편집자가 그가 쓴 원고와 그의 권위를 같은 선상에 두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원고에 짓눌린 편집자의 눈에는 대가의 실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원고는 불완전하다는 명제마저 망각하게 된다. 그런 편집자가 책을 제대로 만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 편집자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원고는 권위가 아니다. 권위라 해도 문제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팩트다. 대가들도 팩트 앞에서는 겸손하다."

'원고의 불완전함'을 메꾸기 위해 저자가 기술한 정보들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는 일을 편집자는 우선으로 한다. 말 그대로 '팩트 체크'. 이 일은 정밀함이 필수 요건이다.

흔히 신입 시절에 저자 문장의 결을 편집자 자신의 문장 결로 바꾸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저자의 문장을 열심히 다듬어 전체 글의 완성도를 올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저자의 문장 특유의 리듬을 지키되, 행간에 빈틈이 없는지 살피는 일임을 나 역시 이제야 터득하는 중이다.

힘을 빼고 전체 원고의 강약을 조절하는 일에서 편집의 공력은 빛난다. 어쩌면 편집자는 이야기의 하모니를 조절하는 사람일 것이다. 편집자는 그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문장에 비약은 없는지, 사실에 바탕한 정보로 쓰였는지, 저자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지, 지나치게 자아도취적이진 않는지 등을 재차 확인한다.

물론 이 일에 숙달된 다음에야 가능한 과정이다. 편집자는,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일이 가지는 무게를 가벼이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좋은 면을 꺼내는 걸 돕고 싶어요 

수십 년 동안 지독하게 책을 만들어왔음에도 끝끝내 책 애호가인 저자는 문학책을 만드는 일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소설가, 시인 등으로 구성된 술자리에서 저자의 지나친 농담을 덤덤하게 감내하며 들어야 했던 일, 자신이 편집한 책의 추천사를 편집자 자신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쓴 일, 이상한 사람이 되어 회사에 나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이직했던 일, 출판사를 창업한 뒤 찾아간 서점에서 구매 담당자의 (아마도 냉정했을 거라 추측하는) 눈빛과 표정을 맞닥뜨린 일…

다른 업계로 이직하지 않고 보통의 편집자로 오늘을 사는 사람이라면 으레 겪는 분투들은, 어쩌면 한 권의 책에 다 담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으레 겪는 분투'가 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오죽하면 책제목이 '편집 후기'가 되었을까 가늠하다 보면, 저자가 전하는 출판업계의 빈곤한 처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대형 서점에 놓인 수많은 책들의 맨 끝 장, 판권지에는 그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작게 쓰여 있다. 그들 가운데 편집자는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누릴까.

저자에 따르면, 그가 근래 재직한 출판사의 신입 편집자 초임은 2020년 기준 30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저자가 출판사 근무를 시작한 2005년 초봉은 18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출판계에 미래는 없다", "출판계 불황은 고유명사"라는 말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도리어 출판계 바깥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다. 야근할 때 근무 외 수당을 주는 곳은 정말 흔치 않다.

이미 알면서도 업계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다수고,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책 만드는 일이 즐거워서 돌아가는 이 생태계를 염세적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금요일 퇴근길에 교정지를 싸 들고 가는 일, 주말에 걸려 오는 저자의 전화를 반갑게 받는 일에 이제 별 감정의 동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음절 한 자를 놓고 밤낮없이 고민하는 사람의 고투만큼 우리 일의 피로를 종종 헤아려 주는 저자(필자)의 이타심에 의지하는 하루도 있다. 그에 앞서 고요한 사무실에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통증을 알아주는 동료들 덕분에 오늘도 이 일을 이어간다.

더 많은 편집자들이 자신의 글을 쓰길
 
"저는 책을 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좋은 부분을 꺼내는 걸 돕고 싶을 뿐이에요. (...중략...) 종이책으로 먹고살지 못하게 되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뒤집고 이벤트 플래너가 될 수도 있어요. 잡화를 만드는 일, 음악 작업을 돕는 일, 이벤트를 여는 일 모두 목적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말을 듣지만, 잔재주뿐이에요. 그림도 못 그리고, 곡도 쓰지 못하고, 카페를 해도 손님 접대는 무리예요. 저는 아무것도 못 하지만, 어떤 좋은 것을 누구에게 전하는 일은 할 수 있어요. 어릴 때 했던 카세트테이프 만들기 같은 일을 지금도 계속하는 거죠."
 
독립출판사를 꾸려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니시야마 마사코)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떤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기꺼이 "헤매고 길을 잃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보다 꽤 가까이서 일하고 있다.

이를테면 깊은 밤, 당신 건너편 전철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 중 한 명은 편집자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실패한 지난날의 통증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책을 사랑하는 일'의 경중을 일러 준다. 만드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되어 여전한 물성의 그것, 애증의 사물 '책'을 독자에게 건넨다.

더 많은 편집자들이 자신의 글을 쓰길 바란다는 저자 덕분에 나 또한 부족하나마 일하는 사람으로서 얼굴을 처음으로 내밀어 본다. 여전히 책이라는 무대 위에는 사랑해 마지않는 이야기가 세워질 것이다.

"내가 읽은 책을 거울삼아 내가 읽을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저자의 이야기는 오늘 어딘가에서 (숨어서) 일하는 한 사람, 편집자를 비춘다. 덜 지치는 회사원, 더 나은 편집자로 나아가는 걸음이 되어 준다. <편집 후기>는 은은하되 강직한 등대의 문장들이다.


편집 후기 -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

오경철 (지은이), 교유서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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