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0 04:34최종 업데이트 23.06.20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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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퇴근하는 택배 대리점이 있는 서울 금천구 가산동 수출의 다리 앞 도로 ⓒ 구교형

 
처음 택배 배송을 시작해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늘 맴도는 구역이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을 비롯한 옛 구로공단 주변이다. 나도 서울 출신으로 서울 성내동과 천호동, 경기도 성남과 광주 등 주로 남동쪽에서 성장했다. 결혼 후 경기도 광명, 안양 쪽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안양천 건너 구로동 쪽은 특별한 연고가 없어 지나다니면서도 큰 관심이 없던 곳이었다.

지금은 매일 출퇴근하는 택배 대리점이 가산디지털단지 중심이자 이름에 역사가 묻어나는 '수출의 다리' 교각 아래 위치해 있고, 배송 구역은 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가리봉동이기에 그곳의 역사와 문화가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오늘은 우리나라 수출 중심 성장 시대를 상징하던 그곳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국 경제개발 시대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던 '구로공단'이라는 이름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 제법 오래되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새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국가 수출주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구로공단 3개 단지도 그런 목적으로 1965년에 착공해 1973년에 완공했다. 구로공단 주력상품은 당시 한국 자본과 기술력의 미약함으로 섬유와 봉제 등 의류 가공품이었다.

1960년대부터 농촌을 떠나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이주한 젊은이들이 공단지역 노동자로 일했다. 이들은 이름 없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고된 노동을 견뎌 한국산업화와 수출입국의 토대를 놓았지만, 경제발전의 공로는 정치권과 재벌들에게 돌아갔다.

전태일 열사 분신을 거쳐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노조 운동을 통해 노동조건과 삶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요구들이 늘어났다. 1979년 YH무역 파업사건은 당시 대표적인 사건이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계에서도 노동자들의 교육, 노조 운동 등을 돕기 위해 산업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구로공단의 뜨거운 열기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지만, 세계 경제와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서서히 식어갔다. 영화 <구로 아리랑>(1989년, 이경영, 옥소리, 최민식 출연)과 <박하사탕>(2000년,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출연)은 구로공단과 가리봉 공단촌을 배경으로 그 시절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민중가요 '사계' 역시 죽어라 미싱 돌려 만들어 낸 멋진 옷을 정작 자신들은 입어보지도 못하는 어린 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였다.

1.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2. 흰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샤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3. 찬바람 소슬바람 산 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편지 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4.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두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 <박하사탕>은 구로공단과 가리봉 공단촌을 배경으로 그 시절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 이스트필름


2000년대 들어 공단과 공장 노동자 거주지로 하나였던 구로공단과 가리봉동은 한국경제구조 변화에 따라 연결고리가 해체되면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지난 후 한국은 급속한 산업구조재편에 들어갔다.

2000년 정부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정보기술(IT) 산업을 일으키려 했고, 봉제공장 중심의 구로공단은 그 운명을 다하고 대대적으로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했다. 구로공단 노동자의 삶터였던 가리봉동 주거지역은 공단 노동자 대신 취업을 위해 한국에 건너온 중국인과 조선족이 자리 잡으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구로공단을 둘러싸고 있던 지하철역 이름들도 속속 바뀌었다. 구로공단역은 구로디지털단지역(2004년)으로, 가리봉역은 가산디지털단지역(2005년)으로 각각 개명하여 시대의 변천을 뒤따랐다.

그러나 국가정책과 사회추세가 아무리 변해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시대의 흔적은 단번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택배 일을 처음 시작한 2015년 무렵 가산역 근처에도 간간이 빨간 벽돌로 담이 처진 옛 공단의 공장건물이 제법 남아 있었다.

주변의 높고 깔끔한 현대식 빌딩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여기가 바로 구로공단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자존심과 같았다. 지금도 가산역 주변에 옛 공단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애써 눈여겨보며 찾아야 할 정도다.

반면, 공단 노동자들의 주 거주지였던 가리봉동 주택가는 여전히 어렵지 않게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수출의 다리를 건너 마리오 아울렛을 지나면 가리봉 오거리가 나오고 그 도로 왼편 가리봉1동 지역은 가리봉 시장 골목 주변에 여전히 옛 주택가의 다가구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화 <범죄도시>의 주 무대다.

처음 택배를 시작하며 탑차 트럭을 그 골목에 어떻게 끌고 들어가, 어디에 차를 세우고, 어떻게 배송할지 모든 게 두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탑차는 좁은 골목만이 문제가 아니다. 골목 가게 천막에도 닿기 쉬워 늘 백미러를 들여다봐야 했다. 지금은 넓이, 높이, 길이 등 모든 게 익숙해져서 다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언덕 쪽에 있는 성프란치스코수녀회 주변 주택가에는 공단 시절 벌집(집 한 채에 미로처럼 방들을 만들고 화장실이 한두 개뿐인 형태)이라 불린 가옥들이 지금도 여럿 남아 있다. 지금은 돈 벌러 온 중국인과 1인 가구 젊은이들이 많이 산다.

오늘도 트럭을 몰고 골목 누빈다
 

공단촌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가리봉동 옛 골목. ⓒ 구교형


남구로역 왼쪽 언덕에 위치한 가리봉2동 지역은 그보다 훨씬 좁고 복잡하다. 골목은 1동보다 훨씬 좁고 가파르며 그래서 일방통행이 많다. 처음 배송을 위해 지도만 보고 골목에 들어섰다가 어디서 돌아야 하는지를 몰라 수십 분 동안 같은 지역을 계속 돌며 진땀을 흘렸다.

이 동네의 특징은 영일초등학교 뒤편에 빌라, 연립 등 4~5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 택배 기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조건이다. 기본적으로 엘리베이터가 없고 다가구주택이 밀집되어 있어 이쪽 구역에 들어서면 택배 물건을 들고 1시간여 동안 계단들만 수없이 오르내려야 한다. 그걸 매일 반복한다. 확신컨대 다리힘 기르는 데는 택배만 한 게 없다.

2015년과 코로나 한 와중이던 2021년에는 주로 가리봉동과 구로1, 2동을 배송했다. 2021년 이후에는 교회 개척 등을 위해 배달 기사를 그만두었지만, 회사에 일손이 부족할 때는 다시 부름을 받았다. 지금은 어느 배달 기사가 그만두고 다른 기사를 찾는 동안 도와달라고 해서 구로디지털단지역 근방 건물과 먹자골목을 돌며 배송하고 있다.

멋모르고 시작한 택배 일이 공교롭게도 옛 구로공단 지역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원래 역사와 시대에 대한 관심이 많은 터라 의외로 흥미롭다. 물론 이 정도쯤 되니 생각도 하며 즐기게 된 것이지, 처음에는 매일 아침 전쟁터에 끌려가는 초년병의 심정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가족을 떠나 졸린 눈 비비며 피곤에 절어 미싱을 밟아댔던 30~40년 전 누이들이 일하고 쉬던 자리에, 이제는 '늘 떠나야지' 다짐하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생각하며 떠나지 못하는 40~50대 아재들이 배송을 위해 오늘도 트럭을 몰고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박카스 한 병 건네주면 좋겠다. 열심히 살지만 갈수록 인생이나 역사가 우리의 수고와 열심에만 달려 있지 않음을 크게 느낀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도서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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