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0 19:20최종 업데이트 21.08.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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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첫 사연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박정민씨의 이야기입니다. [기자말]
"지난번 선고 날에는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인터뷰하자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도망치듯 집에 오다 보니 인사도 못 하고 나왔네."
"그날 무죄 판결을 받으셨으니 정신이 있었겠어요?"

"재심 시작하고 딱 10년 걸렸네. 재심한다고 신경 써서 몸무게가 50kg도 안 나가."
"50년 넘게 억울하게 사셨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행복하게 사셔야죠. 건강도 잘 챙기시면서요."
"맞아.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어. 그동안 억울했던 것까지 전부 합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지난 2020년 12월 16일 서울중앙지법 서부지원(2018재고합2)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박상은씨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1969년 5월 그는 선임 간부의 구타에 못 이겨 부대를 탈영해 자살을 기도했다가 가족 생각에 포기하고 부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복귀 중 길을 잃고 헤매다 보안대로 연행되었고, 보안대는 그에게 '적진 도주'라는 무거운 죄를 뒤집어씌웠다. 군사법원은 무기징역이라는 극형을 선고했고 그는 꼬박 20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랬던 그가 50년이 지나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나도 억울한 점이 많지만 이제 좀 풀렸잖아. 그래서 말인데. 박석주 사건 있잖아. 그것도 좀 신경 써줘. 석주 아들 생각하면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 석주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끌려가서 10년 징역 꽉 채워서 다 살고는, 출소 코앞에다 두고 죽어가지고 고아처럼 자란 아이 아냐. 내가 석주네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

박상은씨는 이야기 끝에 눈물을 흘렸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욕 중에 재소자 망치 맞고 숨져 
  

연행 되기 전 아버지 박석주씨 ⓒ 박정민


그가 말한 '박석주 사건'은 1974년에 있었던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다. 소위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 '일본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사건', '진두현 등 간첩단 사건' 등으로 불렸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는 재일교포 진두현을 포함해 민간인, 군인 등 18명 이상을 연행해 조사했다. 당시 이 사건을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육군보안사령부는 5일 일본을 거점으로 거류민단을 이용,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학원, 군수산업분야에 침투를 기도한 재일거류민단 동경도본부 부단장 진두현(46. 일본 동경도 세타가야구)을 주범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일당 18명을 지난달 10일 서울, 광주 등지에서 일망타진, 이 중 간첩 8명을 포함한 13명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중략)

김종환 보안사령관은 이번 간첩단의 특징이 일본거류민단을 이용, 국내 정치 분야 진출을 획책하고 사회적으로는 불평불만자를 포섭,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려 했으며 학원 및 종교계에 침투, '민주수호동지회'를 조직하고 군수산업분야에까지 스며들어 노조를 통한 지하망 부식으로 군사정보를 수집했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74. 11. 5 1면)

군사정권의 횡포를 막고 민주주의를 실현하자고 조직했던 '민주수호동지회'는 순식간에 '통일혁명당 재건위'이란 반국가단체의 위장 조직이 되었고, 진두현·박기래 등은 이 조직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석주는 박기래와 10촌 사이로 결혼하기 전 박기래의 집에 함께 살며 당시 인천에 있던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 다녔다. 보안사는 군수품을 생산했던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의 직원 박석주가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군수물자의 정보를 탐지해 박기래에게 보고하고, 이 회사의 직원들을 포섭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박석주씨는 기밀탐지 등 간첩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아버지 박석주씨가 박기래씨와 함께 살 때의 모습. 이곳에 살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 박정민

  
대구교도소에 수감된 박석주씨는 그곳에 먼저 들어와 생활하던 박상은씨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달리기를 잘했던 박상은씨는 대구교도소에서 '아베베(에티오피아 마라톤 선수로 올림픽에서 두 번에 걸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박석주씨는 날렵했던 그와 함께 출소 전까지 낮에는 교도소 내 목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다른 재소자의 오해로 사망했다.

"우리하고 같이 복역하던 재소자 중에 아주 착한 재소자 하나가 있었어. 평소에 석주하고 나랑 아주 잘 지냈거든. 그런데 운동 시간에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돌에 머리를 맞았나 봐. 누군가가 그 재소자한테 석주가 돌을 던졌다고 말을 한 모양이야. 말도 안 되지. 석주는 말도 없는 친구야. 아주 얌전해. 말도 조심조심하는 친구야. 그런 친구가 무슨 돌을 던져. 목공장에서 일을 끝내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씻는데 그 돌 맞았다는 재소자가 목공장에서 훔친 망치를 들고 와서는 석주 머리를 뒤에서 친 거야.

아주 순식간이었어. 내가 간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옆에서 '퍽' 소리가 나는 거야. 그래서 돌아보니까 아이고, 내가 그때는 날렵했다고 했잖아. 옆에 있던 철로 된 세숫대야를 집어 들고 그 재소자한테 달려들었어. 세숫대야로 망치를 막으면서 그 사람 가슴을 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리니까 옆에 있던 재소자들이 같이 덤벼서 잡더라고. 조금 더 빨리 손을 썼으면 석주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불쌍해. 출소 몇 달 앞두고. 너무 불쌍하게 갔어."


아들 박정민

박상은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기 전에도 박석주씨의 아들을 찾아 그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박석주씨가 연행될 당시 그의 아내는 아들 박정민을 배고 있었고 2살짜리 딸아이도 있었다.

박상은씨의 노력으로 통혁당 재건위 피해자들의 소재를 알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한 끝에 박석주씨와 함께 잡혔던 박기래씨의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박기래씨의 가족을 통해 박석주씨의 아들 박정민씨와 연락이 닿는 데 성공했다. 그때가 2017년 3월이었다.

"석주 아들하고 연락이 닿으니까 너무 반갑더라고. 그래서 우리 한의원으로 오라고 했지. 아, 밥이라도 먹자고. 그렇게 만나서 보니까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부터 나더라고."

며칠 후 사무실로 찾아온 박석주씨의 아들 박정민씨와 처음으로 만났다. 생각보다 사무실이 작다는 박정민씨의 말에 그냥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차를 마시며 그의 입을 통해 들은 사연은 웃을 수 없는 비참한 이야기였다. 박정민씨는 그 비참한 과거를 바로잡으려고 사무실을 찾아왔다고 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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