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4 19:11최종 업데이트 21.09.0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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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있을 때 잘하란 말들을 합니다. 그 말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요. 누구나 매 순간 자신의 전력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명운이 갈리기도 합니다.

'현상 유지'라는 말은 오늘의 상태를 어제와 다름없이 이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멈추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걸었다고 현재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더라도 주변 누군가가 나보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치고 나가면, 서로의 간격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참입니다. 하물며 복권 당첨의 행운도 꾸준히 구매하는 노력을 들여야 희박하나마 눈곱만한 기대라도 품는 게 허용되니, 거의 모든 일이 다 그런 셈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안온한 나날을 보내는 것만 같은 이웃도, 막상 꺼내놓은 속내를 보면 만만찮은 짐을 지고 살아왔음을 알 때가 있습니다. 나를 앞질러간 이의 뒷모습만이 내 눈에 들어오니 힘들이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 같지만, 우연히라도 그 얼굴을 보게 되면 땀으로 범벅일 게 자명합니다. 숨 쉬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체가 없듯 과정 없는 결과란 건 있을 수 없으니, 이 또한 이치라 할 만합니다.

영국의 필기구 브랜드, 오노토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21년 '토마스 데라루(Thomas de la Rue)'가 자신의 이름을 딴 '데라루(De La Rue)'사(社)를 설립했고,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큰 조폐 회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 데라루가 1905년 '오노토(Onoto)'를 탄생시켰으니, 만년필계 몇 안 되는 영국의 필기구 브랜드가 바로 오노토인 셈입니다.

한때 콘웨이 스튜어트와 함께 영국 만년필계를 주름잡던 오노토의 일생은 드라마틱합니다. 펜 컬러가 화려하거나 디자인이 요란해서가 아니라, 어느 브랜드보다 굴곡진 여정을 거쳐왔기 때문입니다.  
   

몇 되지 않는 영국 만년필 브랜드 중에서 선전 중인 오노토(Onoto) ⓒ 김덕래

 

만년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 알고 있을 정도로, 파카는 유명한 필기구 브랜드입니다. 그런 파카도 매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태어난 곳은 미국이지만, 영국으로 본사를 옮겼다가 현재엔 프랑스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으니까요. 알고 보면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만년필 전성기엔 수많은 업체들이 번성했으나, 달이 차면 기울듯 무수한 브랜드들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습니다. 오마스나 델타, 또 르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합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카웨코와 콘웨이 스튜어트가 그렇고, 오늘의 오노토가 또 그렇습니다.

1905년 설립되었다고는 하나 실제 펜을 만들기 시작한 건 1880년대 초반이니, 그 역사가 사뭇 깊습니다. 현행 만년필의 잉크 충전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파카나 워터맨 같은 브랜드에서 채용한 카트리지&컨버터 타입과 몽블랑이나 펠리칸 등이 주력으로 쓰는 피스톤 필러 타입이 그것입니다.

카트리지는 이미 잉크가 채워진 1회용 소모품이니 논외로 합니다. 컨버터나 피스톤 필러가 적용된 만년필은, 펜촉 끝부분을 병잉크에 담그고 노브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 잉크를 흡입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구조를 '셀프 필링(Self filling)'이라 합니다. 다른 보조도구 없이 펜 자체만으로 잉크를 충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만년필이 탄생했을 때부터 이런 메커니즘이 적용되었던 건 아닙니다.

1898년 미국의 콘클린이 최초의 셀프 필링 방식인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를 만들어내기 전엔, 스포이드 형태의 충전 도구를 사용해 펜에 직접 잉크를 주입해야 했습니다. 이 도구가 눈에 안약을 넣는 점안기와 유사해 '아이드로퍼 방식(Eyedropper type)'이라 불렸습니다. 배럴에 직접 잉크를 채우는 방식이라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있고, 또 구조가 단순해 잔고장도 적지만, 보조도구가 없으면 만년필에 잉크를 담을 수 없으니 불편할 수밖에요.

언제나 불편한 현실은 기술발전의 시발점이 되어 왔습니다. 크레센트 필러를 비롯해 레버 필러나, 버튼 필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셀프 필러는 작동 방식이 대동소이합니다. 배럴 외부에 돌출된 금속을 누르면, 면이 넓은 금속판이 배럴 안에 위치한 고무로 된 '색(Sac)'을 압박합니다. 누른 손을 떼면 수축한 공기주머니가 펴지며 잉크를 빨아들이는 구조입니다.

별도의 스포이드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만년필 사용자 입장에선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습니다. 플런저 필러는 여느 셀프 필러와는 작동 방식이 다소 상이합니다. 내부에 고무 색이 있는 게 아니라, 순간적인 기압차로 잉크를 채우는 방식입니다. 오노토는 아이드로퍼로 시작해 플런저 필러를 내놓으며 셀프 필러 전쟁에 발을 담그게 됩니다.
   

레버 필러와 플런저 필러, 스크루 캡과 슬립온 캡 등의 충전 및 잠금 방식이 적용된 빈티지 데라루 오노토 만년필 ⓒ 김덕래

   
세계 대공황 시대였던 1930년대까지 질주하던 오노토는 1937년 대표작인 '마그나(Magna)'를 선보입니다. 마치 붓에 비견될 만한 부드러운 필기감을 무기로 한 마그나는 오노토의 간판과 다름없었고, 이후 많은 라인업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쉐퍼가 펜에 '화이트 닷(White Dot)'을 찍는 것으로 평생 보증을 어필한 것처럼, 오노토 역시 사용자가 불편을 느끼면 언제까지나 무상으로 살펴주겠다 공언했으나, 시류를 거스르기엔 뒷심이 부족했습니다. 고군분투했음에도 1958년 문을 닫고 맙니다. 이후 시간이 마냥 흐르다 오노토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2005년, '제임스 버디(James boddy)'에 의해 기적같이 회생했습니다.
   

다시 태어난 현행 오노토의 로고 ⓒ 김덕래

 
서로의 지향점이 다를 뿐  

하지만 데라루의 영향력 안에 있던 빈티지 오노토와 다시 태어난 현행 오노토는 제조사가 별개인 것뿐만 아니라 펜의 성향도 확연히 다릅니다. 데라루의 오노토가 한없이 부드러운 연성 펜촉의 끝을 보여줬다면, 현행은 금촉임에도 적당히 버텨주는 반발력이 있습니다.

분명 서로 다른 맛일 뿐인데, 예전의 오노토를 경험해본 이들은 맛집이 재개장해 반가워 들렀더니 예전 그 맛이 아니더라며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닌, 서로의 지향점이 다를 뿐입니다.

과거의 오노토가 단맛의 절정인 설탕에 가깝다면, 현재의 오노토는 첫맛은 쓰지만 끝맛은 되레 단 소금과 같습니다. 오노토의 현행펜 '햄릿(Hamlet)'은 펜촉이 그리 얇지 않아 웬만한 필압은 버텨주면서도, 필기감은 순해 다루기 수월합니다.  
      

비교적 가볍고 슬림하던 데라루社 시절의 오노토와, 상대적으로 두툼하고 묵직해진 현행 오노토 ⓒ 김덕래

 
햄릿은 영국에서 태어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평가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1601년 발표되었으니, 벌써 420년 세월이 흐른 셈입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고전 명작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그저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울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 속 햄릿은 이대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지, 그 답을 모르겠다며 탄식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면 차라리 고민이 덜할 텐데, 되레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햄릿의 발목을 잡습니다.

오노토 햄릿은 블랙과 은은하게 빛나는 화이트 펄을 핀스트라이프 처리해, 은근하면서도 단호합니다. 18K 금촉을 꽂고 장식부는 스털링 실버로 마감했지만, 화려하다기보단 진중합니다. 극단적인 어둠 속에서도 역설적인 밝음이 공존할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펠리칸의 대표 모델 M800과 몽블랑 146과 견줘도 위축되지 않는 외양에, 펜촉도 7호 사이즈를 써 시원스럽습니다.  
   

좌측부터 펠리칸 M800 F촉, 오노토 햄릿 F촉, 몽블랑 146 F촉 ⓒ 김덕래

 
떵떵거리며 살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남들처럼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행복에 겨워 보이는데, 오직 나만 늪에 빠진 것만 같다고도 합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멀리서 봤기 때문입니다. 만년필도 이와 같습니다. 유독 내 펜만 말썽을 부린다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 모든 만년필 사용자가 다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갓 출고된 자동차도 도로 위 포트홀을 못 봐 한번 덜컹거리는 것만으로도 하체 휠 밸런스가 틀어질 수 있는 것처럼, 섬세한 부속끼리의 조합인 만년필이 예민한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아이가 말썽을 부린다고 다그치기만 하면 점점 더 엇나갈 뿐이니, 알아들을 때까지 훈육을 해 바른길로 이끌어주는 게 부모의 도리일 것입니다. 시간이 더디 걸린다고 도중에 윽박지르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니, 끈기를 가져야 할 일입니다.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 살아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라는 말은 참 모질게 들립니다. 삐죽 솟아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진 이웃을 보니, 내 무릎이 다 아팠습니다. 고작 펜 한 자루에도 어둠과 밝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슬픔 뒤에는 기필코 기쁜 일이 뒤따라 온다는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무한정 오르막만 있는 길도, 끝없이 내리막만 있는 길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유령처럼 떠돌던 펜 한 자루가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잘 손봐진 오노토 햄릿 F촉 ⓒ 김덕래


* 오노토(Onoto)
- 한때 '콘웨이 스튜어트(Conway stewart)'와 함께 영국 만년필계를 이끈 필기구 제조사. 토마스 데라루가 이끌던 1905년부터 1958년까지의 빈티지 오노토와, 탄생한지 100년 뒤인 2005년 제임스 버디가 새롭게 살려낸 현행 오노토로 구분됨. 로고를 비롯한 디자인적 요소뿐만 아니라, 잉크충전 메커니즘과 고유의 필기감도 그 특성이 달라져, 마치 다른 브랜드의 펜을 쓰는 것만 같다는 평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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