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6 21:05최종 업데이트 20.11.1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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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네이버 와인 커뮤니티 '★와쌉★ 와인 싸게 사는 사람들' 게시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 커뮤니티 회원이 서울 광진구 자양동 새마을구판장에서 구입한 와인 사진을 올렸는데, 그 와인의 라벨이 내 눈에 제대로 박혔다.
 
카테나 사파타 말벡 아르헨티노(Catena Zapata Malbec Argentino) 2017
 

ⓒ 고정미

 

카테나 사파타 말벡 아르헨티노 2017 말벡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내가 순전히 라벨에 낚여 구입했지만 매우 훌륭한 맛과 향을 뿜어냈다. ⓒ 임승수

   
뭐든 본질로 파고들기 좋아하는 나에게 와인의 본질은 맛과 향이다. 그러한 생각이 확고하다 보니 그동안 병 모양이나 라벨 디자인에 낚여 와인을 구입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와인 생활 이후 최초로 라벨 디자인에 홀렸다. 옆에 있던 아내도 라벨을 보더니 완전히 자기 스타일이라며 호감을 표한다(참고로 아내는 미술 관련 책을 여러 권 쓸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다).
 
자양동 새마을구판장은 상당히 바람직한 가격과 훌륭한 와인 리스트로 최근 와인 애호가의 성지로 급부상한 곳이다. 와쌉 게시판에도 거의 매일 구판장 방문 후기가 올라온다. 안 그래도 성지 순례에 동참하겠다고 맘먹고 있던 차였는데, 아내도 와인 라벨에 관심을 보이니 좋은 구실이 생겼다.
 
지난달 11일, 주말 가족 외식을 구실로 겸사겸사 새마을구판장에 들러 라벨 끝내주는 이 와인을 구입했다. 새마을구판장은 역시 그 명성답게 기본 가격이 저렴한 데다가 온누리상품권을 구입해 제로페이로 결제하면 사실상 10% 할인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사고 싶은 와인이 즐비했지만 호주머니 사정 및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예상되어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딱 하나만 구입해 집에 왔다.
 
실제 와인을 마신 10월 23일까지 수차례 와인 셀러에서 꺼내어 감상할 정도로 인상적인 라벨이다. 이 정도로 공들여 제작한 라벨이라면 분명 무슨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관련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라벨에 담긴 말벡의 역사
 

카테나 사파타 말벡 아르헨티노 라벨 이미지 라벨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상징한다. ⓒ Bodega Catena Zapata

 
카테나 사파타는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카테나(Nicola Catena)가 1902년에 설립한 아르헨티나의 와인 제조사이며, 아르헨티나 말벡(포도 품종)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 와인 라벨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상징한다.
   
맨 왼쪽에 등장하는 '알리에노르 다키텐(Eleanor of Aquitaine)'은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으며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다. 아키텐의 카오르(Cahors) 지역은 말벡으로 유명하며, 기록에 따르면 알리에노르는 헨리 2세와 결혼하여 영국 여왕이 될 때 말벡을 영국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아마도 말벡 원산지와 연관된 유력 인물이라 첫 번째로 등장한 듯싶다.
 
그다음 '이민자(The Immigrant)'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연결한 탐험가와 모험가를 상징한다. 오른손에는 지도, 왼손에는 아메리카에 심을 종자를 들고 있다. 몸에는 화살이 여러 개 박혀있는데,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고통을 의미한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살을 맞으며 순교한 성 세바스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세 번째 등장인물은 뼈만 앙상한 데다가 인상 참 고약한데, 유럽 포도나무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Phylloxera)'를 상징한다. 필록세라의 원산지는 북미대륙인데 19세기에 포도나무 품종 개량을 위해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를 유럽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유입됐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필록세라와 공생하며 면역력을 가진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와 달리 유럽 포도나무는 내성이 없었던 탓에, 말 그대로 유럽의 포도밭이 초토화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때부터 유럽의 와인 업자들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으로 이동해 해당 지역의 와인 산업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맨 오른쪽의 마지막 인물은 와인 제조사 카테나 사파타를 상징한다. 창업주 니콜라 카테나의 증손녀 아드리아나 카테나(Adrianna Catena)를 모델로 했다. 이 인물의 발치에는 선주민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를 본뜬 카테나 사파타 와이너리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라벨에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담을 만큼, 이 와인은 카테나 사파타 사가 자신 있게 내세우는 와인이다. 2017 빈티지는 RP(로버트 파커) 95점을 받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말벡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내가 순전히 라벨에 낚여 구입했지만, 코르크를 열고 병 주둥이에 코를 대니 피어오르는 가죽+바닐라의 강렬한 느낌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전혀 다른 품종인 고급 피노 누아 와인에서도 비슷한 풍미를 느낄 때가 있으니, 가죽+바닐라 향은 포도 그 자체보다는 아마도 양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프랑스 오크통에서 기인할 것이다. 선호하지 않는 품종임에도 어쨌든 첫 느낌은 상당히 괜찮았다.
 
이 와인은 브리딩(와인의 맛과 향을 끌어내기 위해 공기에 노출시키는 작업)을 굉장히 오래, 심지어 반나절 하라는 조언을 본 적이 있어서 간만에 디캔터를 사용했다. 마침 집 근처 신장개업 고깃집이 마트보다 가격이 좋아서 한우 채끝으로다가 520그램 구입했다. 바람직한 붉은 빛깔 고기를 불판 위에서 마구 못살게 굴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디캔터에 담긴 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니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 좋은 와인을 안주가 망치다니
 

문제의 채끝 등심 필록세라가 유럽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듯이, 이 소고기가 우리 가족의 뱃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임승수

   
이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콜라보를 탐닉할 시간이다. 먹기 좋게 잘린 채끝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씹기 시작했다. 인절미처럼 고소한 특유의 육향이 입안 가득 퍼지니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자연스럽게 와인 잔으로 손이 간다. 저가 말벡의 앙상함과는 비교 불가한 꽉 채운 풍미, 거칠지 않고 매끄러운 타닌,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우아해지는 질감이 이 와인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말벡과 한우 채끝의 궁합이야 꼭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을 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병의 1/3쯤 비우고 절반을 향해 가는 중, 함께 마시던 나와 아내의 몸에서 이상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역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아닌가. 본전 생각에 꾸역꾸역 안주와 와인을 욱여넣었지만 이내 뱃속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주와 와인의 맛을 차분하게 음미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그때부터 일주일가량 설사와 싸우게 되었다. 와인 라벨의 그 인상 더러운 뼈다귀 필록세라가 유럽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듯이, 그날 먹은 소고기가 우리 가족의 뱃속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좋은 와인 마시면 뭐하나, 안주가 다 망쳐 버렸는데. 아이들은 그나마 증상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나와 아내는 콩 먹으면 콩 나오고 팥 먹으면 팥 나오는 지경이었으니, 체중이 2kg가량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 고깃집에 가지 않는다.

라벨이 워낙 멋있어서 병은 보관 중이지만 배탈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 일단 밀폐된 수납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말벡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매우 훌륭한 선택이 될 와인이다. 다만 나에겐 와인의 추억보다 배탈의 추억이 더 강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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