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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선 왜 의대 증원 논란이 없었을까

꼬일대로 꼬인 의대 정원 증원 문제... '법의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등록 2024.04.05 13:37수정 2024.04.0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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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3월 29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라에 의사 수가 부족하여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2000명을 증원 처분하기로 한다. 이에 반발해 전국의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직을 하고 병원에서는 파업이 일어난다. 위급한 환자와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병원에 남은 인력들은 과도한 피로를 호소하며 쓰러진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 여당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 간의 비공개 면담이 진행된다. 여기에 시민단체는 '밀실협상은 안 된다'며 반대 성명을 낸다.  

독일에는 왜 의대 증원 논란이 없는가

정부가 의대 증원 계획을 발표한 것이 2023년 10월이니, 무려 5개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의대 증원 문제로 발생한 의료 대란을 보면서 떠오르는 사례가 있다.

많이들 알고 있듯이 독일에는 사교육 열풍이나 살인적인 대학 입시가 없다. 대체로 균질한 대학들이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고 입학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정원 제한 없이 입학시키는 정책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에도 의대 입학은 쉽지 않다. 의학, 심리학 등 양질의 실습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전공의 경우 정원이 제한된다. 독일의 의대도 우리처럼 최상위 성적의 학생들만 합격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존재한다. '기다리기'라는 입학 경로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의 60퍼센트는 공부를 가장 잘한 학생들, 아비투어(독일의 대학 입학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로 채워지고, 20~30퍼센트는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한 학생들로 채워진다. 

약학, 치의학 등 의학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며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고, 구급 요원 또는 요양 간호사 등 유관 분야의 직업을 선택하며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기다리는 동안 의사의 자질을 미리 훈련하는 이들에게는 추가점을 주어 대기 기간을 단축시켜주기도 한다.

아무나 의사가 되어도 돼?


의대 정원의 일부를 순서를 기다리는 학생들로 채운다는 게 매우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의대에 입학했다고 쉽게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만찮은 의대 교육 과정에서 적잖은 학생들이 탈락한다. 기다렸다 들어온 학생들의 경우 학교를 졸업한 이후 여러 해의 공백이 있다 보니 살인적인 암기 분량과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한 의대 공부를 따라가는 게 어렵다. 

의사가 된 뒤에도 혹시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거나, 환자들이 편견을 갖고 진료를 꺼리지는 않을까? 나 역시 한국 사람 특유의 편견과 선입관을 벗어나지 못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의사들의 대답이 가장 궁금했는데, 일반 시민이거나 의사이거나 그들의 대답은 대체로 동일했다.

"의대 공부에 적응해 생존했다면 자격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열망했기에 더 헌신적으로 의사의 직분을 수행한다. 특히 구급 요원 등으로 일하며 기다렸던 이들은 인간의 건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좋은 의사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의대 입시 개입?

얼핏 완벽해 보이는 독일 의대 입시 제도인데 더 개선할 게 뭐가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2017년 독일 헌법재판소가 의대 입시에 개입한다. 당시 독일 헌법재판소는 의대 정원이 지나치게 적게 책정되어 있어서 확대하라는 입장을 낸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이미 충분해 보이는 의대 입학 경로에 다양성 강화를 더 요구한다.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전형의 경우에도 오직 성적만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능력을 고려해야 하며, 기다려서 입학하는 전형도 현행 장기 7년은 지나치게 긴 기간이므로 이를 3~4년으로 단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애초에 법과 제도는 왜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법은 만들어지면 누구나 지켜야 한다. 누구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은 모두가 지켜야 하는 법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법이 갖는 본질은 적어도 입법자가 이해관계의 주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법과 제도의 주인은 바로 시민 모두여야 한다. 각각의 시민들이 가진 이해와 이익의 균형을 잘 맞추어 입법하는 것이 법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모두를 위한 최선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의대 정원을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 의사협회는 이해당사자인 자신들이 정부 협상의 당사자가 되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주체인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국민은 빠져 있다. 

전의교협, 의대 증원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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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관련 정부-의사 대치상황 장기화 사태에 대해 너머서울, 서울풀뿌리시민사회네트워크,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 서울지역 201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공백 상태 해소’와 ‘공공의료 확충’을 촉구했다. ⓒ 권우성

 
그간 의대 증원 처분과 관련해서 모두 세 건의 집행정지가 신청되었지만, 모두 각하되었다. 이에 4월 5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정부가 공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교육의 자주성 등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7년 당시 독일 헌법재판소가 의대 입시에 개입했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협회와 갈등은 없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하는 의대생들이 수업거부를 한다거나 의사들이 진료를 중단하였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정원을 늘리는 결정은 사회의 이목을 끄는 뜨거운 뉴스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시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헌법의 기본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헌법'의 정신은 모두를 위한 삶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시민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보면서 성장해왔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법의 상상력을 좋은 도구로 사용해왔다. 대다수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교육, 성적만이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다양한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법이 먼저 이끌어왔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거대해진 이 입시 문제를 독일 사회처럼 공정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는 없을까.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왜 이해당사자들과의 논쟁만 부각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그간 우리 법의 나태함에도 책임이 있다. 한국 사회의 극심한 엘리트주의와 살인적인 명문대 입시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법은 적극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다. 이제 법의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의대증원 #의사 #독일 #헌법재판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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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학자/변호사 20년간 헌법을 연구해왔다. 헌법재판소에 재직하며 국회 날치기 표결, 학교 주변 영화관 금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 처벌 등에서 위헌 판단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미국 노틀담 로스쿨 석사, UC버클리·연방사법센터 방문학자,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인하대 로스쿨 조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클라스한결 변호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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