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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

[기억은 공간에 스민다] 미완의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등록 2024.04.02 11:21수정 2024.04.0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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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기억과 안전의 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 새겨진 현판 ⓒ 권은비

 
기억공간은 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 1주기 즈음 참사 현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는 이름의 기억공간이 만들어졌다.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참사를 둘러싼 정쟁과 갈등, 정치와 애도 사이에서 한밤중에 있지도 않은 길을 새로 만드는 과정처럼 아슬아슬하고 조심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했다.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 예술감독으로 참여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길이 미완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짚어보고자 한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모든 참사가 그렇듯 이태원 참사도 몇 개의 문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참사 현장이기도 한 기억공간에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의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태원 참사의 부상자가 몇 명인지 모른다. 경찰은 196명, 검찰은 294명, 행정안전부는 320명으로 공식 집계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참사 대응과 기록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제각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희생자와 부상자의 숫자만으로 이태원 참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기억공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의무다. 이태원 참사 직후 선포된 국가 애도 기간은 이 참사를 설명하고 이해할 우리의 '언어'를 앗아갔다. 정부에 의한 사회적 참사 희생에 대한 규범화, 표준화된 슬픔의 강요는 피해자와 시민들에게 한 줌의 위로도 주지 못했다.

참사 이후 많은 시민이 참사 현장을 찾아 애도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단 한 번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은 기억공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했다.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기억공간은 필요하다. '그때 왜 구하지 못했는가'라는 반성적 성찰이 기억공간에 남겨질 때, 기억공간은 애도의 공간을 넘어 성찰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 단순한 질문에 우리 사회는 여전히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 만난 다른 유가족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유가족에게 힘이 되는 사람은 같은 유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서로를 알 수 없었다. 유가족 스스로 다른 유가족을 수소문해서 만나야 했다. 지금까지도 이태원 참사는 누가 희생자인지, 누가 1차 피해자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모르는 이름들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희생자를 온전히 애도하고 피해자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기억공간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완성하지 못한 이유다.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진입부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남아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이유다.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


미술가로서 미완성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참사 이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의 예술감독으로서 유가족, 생존자, 상인, 목격자, 여러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진상규명이다. 참사 이후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이를 막아서는 상황에서 완전한 기억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상규명은 기억공간의 필수 요건 중 하나다. 두 번째는 왜곡된 본질이다. 국가의 부재는 기억 문화가 조성되는 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 핼러윈 문화와 놀이문화에 대한 비난은 참사와 애도의 본질을 직면하는 과정을 흐리게 했다. 더불어 희생자와 피해자를 향한 국회의원, 정부 관계자들의 폭력적인 언행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참사 애도 과정을 퇴행시켰다.

세 번째는 기억공간의 공적인 특성이다. 참사 피해자들과 정부 기관의 소통 없이는 기억공간 조성이 불가능하다. 공공장소에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법적 절차와 협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즉 공공장소에 기억공간을 만드는 일은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역할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기억공간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 한 임시적 형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들은 이태원 참사 1주기 즈음까지도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시와 용산구 등 관계 기관은 기억공간을 조성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행정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 현장을 기억과 애도의 공간으로 만드는 일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할 과제였다.

예술감독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구상 초반부터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유가족들과 함께 논의하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역 상인들도 만나고 행정기관 담당자들도 만났다.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임시적 형태로라도 기억공간을 만들기 위해 서로 의지를 갖고 지난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탄생한 임시적이고 미완적인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다양한 예술가와 디자이너, 시민의 참여로 3개의 빌보드를 2개월마다 교체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전히 이태원 참사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현재 빌보드에는 "부디, 그날 밤을 기억하는 모두의 오늘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13개국 언어로 쓰여 있다. 세계 곳곳에서 외롭고 비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다국적 희생자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빌보드에 한 문장씩 새겼다.

남겨진 과제

사회적 재난과 참사를 기억하는 일에 끝은 없다. 어렵게 기억공간이 조성된 후에도 지속적인 유지와 관리, 기억문화의 재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지속가능한 기억공간이 만들어지려면 장기적으로 운영할 주체와 예산이 토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서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할 국회, 적극적인 법 집행으로 참사를 기억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할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상황은 참사마다 반복된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가족들이 거리로 나서고, 책임지지 않는 국가의 역할을 시민사회가 대신하는 상황은 기억공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이후 겨울이 오고 2023년 봄, 여름, 가을을 지나는 동안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해 전국을 돌며 흩어져있는 다른 유가족들을 만났다. 행진을 하고 단식을 하고 오체투지, 삭발투쟁을 진행했다. 이러한 유가족들의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태원 참사 현장 모퉁이 바닥에 앵커볼트 하나가 노출되어 있었다. 15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후 수많은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 현장을 오가며 재발 방지를 말하는 동안에도 그 앵커볼트는 그대로였다. 누군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태였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그 앵커볼트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 앵커볼트 하나가 그들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앵커볼트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 공사 중에야 제거됐다. 참사의 길 위에 위험하게 솟아있던 앵커볼트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아주 작은 문제조차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만들며 깨닫게 되었다.

참사의 현장을 미완의 기억공간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생명의 존엄함을 묵살했던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참사는 반복될 것이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언제라도 잊혀질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망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따라서 기억은 '기억하다'라는 현재진행형의 동사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과 같다. 참사 현장의 기억공간은 망각에 맞서는 물리적 공간이자 참사의 시간과 희생자를 언제라도 다시 호명하여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곳이어야 한다. 미완의 공간이 희생자들과 지금도 싸우고 있는 유가족, 생존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다시 만들어지는 날, 그때야 비로소 한국 사회가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 권은비 미술가,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예술감독.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4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기억공간 #사회적참사 #1029이태원참사 #1029기억과안전의길 #권은비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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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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