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31 16:32최종 업데이트 24.03.3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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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조망 ⓒ 윤태옥

 
크든 작든 산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게 좋다. 전쟁에서는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제어할 수 있다. 이를 감제(瞰制)라고 한다. 이런 지점을 차지하는 것이 군사작전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서울의 연세대학교 옆에 있는 안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안산은 해발 295미터밖에 안 되지만 그곳에서는 경복궁과 육조거리, 그리고 남산까지도 빤히 보인다. 북악산과 청와대도 걸어서 3킬로미터 안쪽이다. 시선만으로도 권력의 좌표를 감제할 수 있다고나 할까. 서북 방면에서는 안산 아래의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서울의 중심이다. 


안산에서 시선을 돌려 연세대학교로 내려가면 무악정을 거쳐 외솔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이어진다. 능선은 연세대 서문에서 서남 방향으로 이어진 조그만 야산을 이루고는 성산로로 내려선다. 한국전쟁의 서울탈환 전투에 등장하는 연희 56고지가 바로 그 조그만 야산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전투를 끝내고 보니 1500여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던 전투의 현장이다.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에 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해병 1사단은 곧이어 한강으로 진격했다. 김포비행장과 영등포 두 곳이 목표였다.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가 거대한 기습을 당하고는 당황했다. 중국은 이미 정보분석을 통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고 북한에게 두 차례나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낙동강 전선에만 마지막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최용건 서해지구방어사령관은 약 2만에 달하는 수도권의 병력을 집결시켜 수도 서울의 방어에 나섰다. 

미해병 5연대는 김포비행장으로 향했다. 충분한 방어대책이 부족했던 인민군은 황급히 철수했다. 얼마 후 역습을 해왔으나 이를 격퇴하고 18일 새벽에는 비행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 해병대는 김포반도로 진공해서 21일까지 인민군 잔적을 소탕했다. 20일부터는 유엔군의 거의 모든 항공기가 김포비행장에서 발진할 수 있게 됐다. 이미 제공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훨씬 강해진 셈이다. 

소사를 거쳐 경인가도를 따라 공격하던 미해병 1연대는 5연대보다 고전했다. 육상교통으로는 영등포역이 핵심이었고 서울 쟁탈을 위한 빗장이 걸린 곳이었다. 유엔군의 공격과 인민군의 방어가 치열했다. 미군은 19일 저녁에야 안양천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한강을 행주나루에서 도하해 강 건너의 행주산성을 점령하기로 했다. 19일 저녁에 시도한 첫 번째 도하는 실패했다. 인민군의 방어를 경시했던 것이다. 20일 새벽 4시 준비사격을 시작했고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강습도하에 성공했다. 9시40분경 2백여 인민군을 사살하고 목표 고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했다. 행주나루뿐 아니라 김포나 영등포에서도 한 차례씩 고전을 겪고서야 진공할 수 있었다. 22일 영등포를 포위 공격했고 23일 한강 인도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7사단 31연대 32연대는 수원 방면으로 진출했다. 낙동강에서 북상하는 유엔군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22일 수원비행장을 확보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남에서 서울 방어를 지원하는 것도 차단됐다. 

한미 해병은 21일 저녁에는 백련산-104고지(지금의 궁동근린공원)-68고지(성산근린공원)를 잇는 능선을 확보하고 서울 중심부를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인민군은 안산-연희 56고지 능선과 노고산-와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의 연희로를 두고 서북의 한미 해병과 남동의 인민군이 대치한 것이다. 

한국 해병의 공격목표는 연희 56고지였다. 해병 1대대가 22·23일 전력을 다해 공격했으나 300여 사상자를 내고는 미군 해병대에게 임무를 넘겨야 했다. 미 해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 F중대는 생존자가 7명에 불과할 정도 전투가 치열했고 젊은 병사들의 목숨을 쏟아부었다. 24일 야포와 폭격 지원을 받으며 D중대를 투입해 격렬한 전투 끝에 연희 56고지를 점령했다. 연희고지를 점령함으로써 한미 해병은 서울 서측의 주진지를 돌파했다. 연희 56고지는 전초기지가 아닌 주진지였고 곧 서울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처절했다. 고지를 점령한 D중대는 26명만 생존했고 중대장 스미스도 전사했다. 이런 연유로 안산-무악정-연희 56고지-와우산을 잇는 인민군의 방어선을 스미스 능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그곳에는 1500여 구의 시체가 즐비했다. 공격한 자도 방어한 자도 물러서지 않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게 전쟁이다. 생각해 보면 전투에서의 명령이란 지휘관이 자기 부하들에게 죽는 순서를 매겨주는 것이기도 하다. 
 

연세대 서문, 사진 우측이 연희 56고지 ⓒ 윤태옥

 

연희 56고지 전투 ⓒ 봉주영


서울 점령당한 지 90일 만에... 태극기를 게양하다

22·23일 연희고지 전투가 치열할 때 미10군단은 새로운 기동부대를 서울 남쪽에 투입해서 양재 방향에서 포위하고 한강을 도하하기로 했다. 인천에 후속부대로 상륙한 국군 17연대도 신사리(지금의 신사동)로 투입됐다. 25일 새벽 준비포격 후 안개 속에서 커다란 저항 없이 서빙고로 도하했다. 그리고 남산 응봉산 용마산 망우리로 전개해 경춘가도와 중앙선 철도까지 차단했다. 이로써 유엔군은 서울 남동쪽 외곽선을 차단하며 인민군을 포위했다.

드디어 서울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미해병 1사단과 한국해병 1사단이 투입됐다. 9월 25일 인민군이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시가지의 방어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26일 시가지의 반 정도를 탈환했고 27일 오전 6시10분 해병대가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서울을 점령당한 지 90일 만이었다. 28일 서울을 완전히 확보했고, 서울시와 서울경찰이 시정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양곡을 풀어 시민들에게 배급했고 시민들은 복구작업에 참여했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정부는 시민들보다 먼저 서울을 탈출했다가 미군의 힘을 빌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9월 29일 오전 맥아더와 이승만이 김포비행장을 통해 서울에 도착했고 정오에는 중앙청 로비에서 환도식을 거행했다. 맥아더가 먼저 연설하고, 이승만이 이어서 연설했다. 오후부터 정부는 서울에서 업무를 재개했다. 

미8군은 미10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이튿날인 9월 16일 9시부터 총반격을 하기 위해 11일 이미 반격 작전명령을 하달해 두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들이 후방이 차단될 위험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파된 다음에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 인민군은 김천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13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미8군은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을 약 10만 병력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7만 정도였다. 중화기와 전차도 편제의 반 정도였고, 진지보강이나 예상 접근로에 대응할 포병과 공병 장비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무차별적인 공중폭격으로 전장 공포증도 많았고, 보급 문제로 사기도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인민군은 38선에서 낙동강까지 휴식 없이 진공해 왔고, 최근 한달 반은 사력을 다해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더 이상 진공하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이에 비해 유엔군은 병력이 15만7천 수준으로 두 배 정도였고, 화력도 중화기는 6:1 수준일 정도로 월등했다. 제해권과 제공권은 전혀 비교할 상대가 아니었다.

당시 인민군의 상황에 대해서는 9월 21일 미1기병사단에 투항한 인민군 13사단 참모장 이학구(대령급)의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이 복무하던 13사단은 전투부대로서의 능력을 상실했고 사단과 연대 간의 연락도 두절됐을 뿐 아니라, 병력도 19연대 200명, 21연대 330명, 23연대 300명으로 사단 전체 병력이 15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70~80%가 남한에서 강제 동원된 의용군으로 전투력이 부실했다. 전차는 전부 파괴됐고, 9문의 야포와 5문의 120mm 박격포가 있을 뿐이며, 보급은 한 달 전부터 식량이 반으로 줄었고, 차량은 30대만 가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3사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사단들이 대동소이했다.

유엔군의 총반격
 

38선까지 반격 ⓒ 봉주영

 
9월 16일 유엔군의 총반격 공세가 시작됐다. 대구 정면을 돌파한 주공은 미1기병사단이었다.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자 18일 국군 1사단을 우측으로, 미24사단을 서쪽으로 긴급 투입하여 돌파에 성공했다. 낙동강 전선 전체적으로 9월 21·22일 인민군의 전선이 급속하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전선만으로도 인민군의 공세에서 유엔군의 공세로 균형추가 넘어갔는데, 후방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전쟁의 판이 통째로 뒤집힌 것이다. 유엔군은 반격 개시 6일 만에 낙동강 전선을 완전히 돌파했다.

낙동강 서부에서는 반격작전이 순조롭게 전개됐다. 인민군은 16일 오후 낙동강을 서쪽으로 건너 철수했고, 미2사단이 18일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작전 3일째가 되자 낙동강 서측을 대부분 장악했다. 22일에는 신반리(박진 건너편) 초계면(합천의 턱밑)을 점령해, 합천-논산 선으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했다.

마산 서부에서는 미25사단이 어려움을 겪었다. 여항산 서북산 전투산 고지에서 인민군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18일 저녁 인민군이 별안간 전투산(661고지) 진지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인민군 7사단이 먼저 철수했고, 6사단도 서북산에서 철수했다. 미25사단은 19일 마산-진주 도로를 따라 진출했다. 일부 인민군의 저항이 심해서 진격이 더뎌지기도 했으나 25일 남강을 건넜고 26일 의령을 점령한 후 28일 진주로 전개했다.

낙동강 전선의 중동부 지역은 국군 6사단이 조림산(팔공산 북쪽)을 공격하면서 시작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저항이 심해 공격을 중단했다. 조림산을 22일 다시 공격했으나 인민군은 진지를 비우고 퇴각한 상태였다. 국군 8사단은 기룡산과 보현산(경북 영천)이 첫 목표였다. 8사단은 노고령을 점령하고 백병전 끝에 기룡산도 점령했다. 보현산은 저항 없이 점령했다.

동부지역은 1군단의 수도사단과 3사단이 반격을 시작해 17일 안강을 탈환했다. 18일 기계를 탈환하는데 인민군이 3일간 저항해 21일에야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했다. 동해안의 3사단은 형산강을 도하했다. 인민군 5사단은 이미 재기불능 수준으로 피해가 컸기 때문에 동해안 도로 따라 울진으로 후퇴하고 일부는 비학산으로 숨어들었다.

인민군이 38선을 침범했을 때 미들급 선수가 플라이급 국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이었다. 이때 헤비급 선수인 미군이 서둘러 뛰어들었으나 인민군이 기세 좋게 몰아붙여 낙동강 코너까지 몰고 가긴 했다. 그러나 초반 KO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계속 몰아붙이다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낙동강에 기대 숨을 몰아쉬는 순간, 헤비급 선수가 긴 팔을 뻗어 회심의 일격으로 옆구리 인천을 찍었고, 이 한 방으로 인민군 전체가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9월 23일 미8군 사령부와 육군본부는 부산에서 대구로 지휘소를 이동했다. 유엔군은 인민군 전선이 붕괴된 것을 확인하고는 추격명령을 하달했다. 추격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각 사단은 측방 경계를 고려하지 말고 무제한 공격을 가하면서 진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추격전은 인천에 상륙한 미7군단과 연결하는 경부축선, 그 외에 서남부, 중동 산악지대, 동부 해안지대로 나뉘어 전개됐다. 주전장인 경부축선에서는 대전 탈환이 도드라지는 정도였다. 호남 영남지역에서 밀려가던 인민군들이 대전으로 모여들었으나 유엔군을 상대로 일부 지연전을 펼치는 정도였다. 

추격작전은 말 그대로 패퇴하는 적군의 덜미를 잡고는 빠른 속도로 진격하며 공격하고, 잔적은 후속부대가 소탕하는 식이었다. 인민군이 6월 25일부터 8월 초까지 한 달 반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였으나, 이번에는 유엔군이 단 15일 만에 38선까지 밀어붙이는 대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다시, 38선
 

안산의 조망 ⓒ 윤태옥

 
이렇게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인민군은 급속하게 퇴각했다. 말이 퇴각이지 패잔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부대가 적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의 13개 사단 가운데 6개 사단은 북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흩어지면서 상당수가 포로가 됐고, 인민군 6사단을 비롯한 7개 사단만이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고 38선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사단이라 해도 사단 편제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다. 

추격전을 펼친 끝에 유엔군은 38선에 횡으로 도열하듯 집결했다. 개성에는 미1기병사단이, 동두천에는 국군 8사단, 포천은 7사단, 춘천은 6사단, 평창에는 수도사단, 양양에는 3사단이 진격해 갔다. 3사단은 추격전 초반에 트럭 25대를 확보해 어느 부대보다 빠르게 기동했다. 15일간 일일 평균 17.3킬로미터의 속도로 진격했다.

이 가운데서도 23연대3대대 전초중대가 가장 먼저 양양의 38선에 도착했다. 3사단은 10월 1일 유엔군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했다. 훗날 이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변경했으니 이승만의 북진통일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38선이다. 그러나 38선은 대단히 민감한 선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38선은 진작에 사라졌다.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경선 아닌 국경선이었으나 한번 침범당한 38선은 무너진 국경선일 뿐이었다. 남북의 전력이 대치하던 38선은 이제 지리멸렬하는 인민군을 기세등등한 유엔군이 추격하는 교전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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