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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대신 병원 택한 의사들... "배신하면 매장한다" 협박받기도

200여명 사직에 전공의 10명인 곳도... 의협에 광고저격 당한 교수 "일종의 린치, 비열해"

등록 2024.02.23 20:23수정 2024.02.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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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 일간지 광고 ‘교수님! 제자들이 왜 그러는지는 아십니까?’(2월 21일자). ⓒ 권우성

  
"200명 가까이 사직서를 냈습니다. 일하는 전공의가 10명도 안 돼요."

동료 의사들이 전부 병원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수도권 대학병원 전공의 박선빈(가명)씨는 지금도 병원을 지키면서 근무하고 있다. 박씨는 사직서를 내고 진료를 중단하거나 병동을 비우는 전공의 집단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 환자 목숨을 볼모로 의사들이 "실력 행사에 나서서는 안 된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 집단행동은 다른 직종보다 훨씬 치명적이에요. '우리 요구를 안 들어주면 환자들이 치료 못 받고 죽는다'는 식이에요. 그렇게 사람 생명을 가지고 협박하는 방식이 용인되어서는 안 돼요."

박씨는 지난 21일 <중앙일보> 1면에 실린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 광고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가 의대 증원으로 의사 수를 늘리면 전공의들이 수련을 그만둔다'는 광고였다. 그는 "전공의들의 의대 증원 반대 이유가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인데 이런 식의 메시지가 도대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의료계 내 갈등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자멸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지난 20일부터 대형병원 핵심 의료인력인 전공의들이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하며 일제히 진료를 중단하고 있는 가운데, 박씨처럼 집단행동에 반대하는 의사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13일부터 23일까지 근무시간을 쪼개어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전공의들은 하나같이 '의사 집단의 직역 이기주의'를 비판했다.

환자 없어 텅텅 빈 응급실... "집단 엘리트주의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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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인한 의료대란에 대비해 정부가 군병원 12곳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전 한 민간인 응급 환자가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서울 소재 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 남도연(가명)씨는 "의사들이 단체행동을 하게 되면 의료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단체행동의 위협적인 효과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의사들이 의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태도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집단 엘리트주의와 우월감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집단행동의 뚜렷한 명분도, 의료 공공성에 대한 인식도 의사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앞서 거론한 신문 광고를 두고도 그는 "주로 개원의로 구성된 의협 입장을 뚜렷이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며 "개원가(개원의 의료업계) 환자가 줄어드는 것은 의사 수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쉽게 3차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볼 수 있는, 1차 의료가 취약한 우리나라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공공병원을 비롯해 1차 의료를 염두에 둔 의사 수 증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 이시영(가명)씨는 이번 집단행동이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 같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때 의사들이 의대 400명 증원에 반발해 파업(집단 휴진)을 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의사들 사이에 조성돼 있다"며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의대생과 전공의의 심리에는 자신들의 미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낸 뒤로 응급실에 환자가 거의 없다"며 "많게는 70~80명까지 3~4시간씩 대기하던 응급실이 지금은 심정지 환자를 빼면 파리가 날리다시피 해서 4~5명 정도밖에 없다. 그 많았던 응급환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병원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배신자 낙인"... '필수의료' 빠진 정부안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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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지난 2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 보건복지부

 
집단행동에 반대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전공의들이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도 지적됐다. 집단의식이 강하고 폐쇄적인 의료계 문화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파업 참여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박씨는 "배신자가 나와선 안 된다는 말이 내부에서 나온다"며 "끝까지 집단행동에 함께 참여하면 모두가 피해를 안 볼 수 있는데 한 명이라도 배신하면 피해가 생길 거란 얘기를 의사들 사이에서 한다. 배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매장당할 거란 얘기도 나온다. 선후배 사이에서 집단행동 참여를 강제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남씨는 "의사 선배들이 기명 투표를 통해 집단행동을 강요하기도 한다"며 "병원 내 전문의와 교수들도 의사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단 본인들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전공의들에게 집단행동 참여를 바라는 분위기가 있다. 지금의 의사 집단과 다른 행동을 보이게 되면 나중에 상황이 마무리되더라도 일종의 낙인이 찍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부 정책에 찬성하는 건 아니다. 이들은 '의대 정원을 늘리기만 하면 필수의료 인력난이 해결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에 기대어선 안 된다'며, 의대 증원 못지않게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로 인력을 배치하는 문제 역시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정부가 공공의료를 강화하기보단 2000명이라는 인상적인 숫자를 던져서 포퓰리즘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며 "지금처럼 분명한 방향성 없이 의사 수만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이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활성화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씨도 "단순한 숫자놀음보다 중요한 건 필수의료를 강화하기 위해 의사 수를 어떻게 늘리고 적절한 곳에 배치해서 양성할지를 논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정부 정책의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며 "공공의대 설립과 지역의사제 같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의사 수를 늘려놓기만 하면 시장 논리에 따라 필수의료가 강화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부와 의사 집단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다가 모두 상처를 입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수의료를 위한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윤 서울대 교수 "돈 더 벌겠다고 환자 내팽개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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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 서울대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과 교수 ⓒ KTV 캡처

 
한편 의협이 게재한 광고에는 특정 교수의 이름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이는 그동안 의대 증원을 강하게 주장해온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 교수는 지난 20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종합병원 봉직의 연봉이 최근 3억~4억 원까지 올랐다", "의사가 부족하지 않은데 대학병원 전공의가 주 80시간씩 일하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김 교수는 2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의협과 다른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광고를 내어 일종의 인신공격과 린치를 통한 입막음이 가해지고 있다"라며 "굉장히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짓"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들을 향해 "환자를 위하는 의사가 돼야 국민에게 신뢰받고 존경받을 수 있고 경제적 이익 등 의사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돈을 더 벌겠다며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불신과 미움을 받으면 의사들이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부의 의약분업 사태 시위를 주도했던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도 이날 전공의들의 병원 복귀를 촉구했다. 권 교수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의사로서 직업윤리와 전공의로서 스승에 대한 예의, 근무자로서 의무 등을 고려할 때 여러분(전공의)의 행동은 성급했다"며 "투쟁을 하고 싶다면 병원으로 돌아와 내용을 심도 깊게 파악하고 국가의 문제들에 대한 더 나은 정책 대안을 갖고 정부와 대화하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오전 보건의료 재난경보 단계를 최상위인 심각으로 격상하고 의사 집단행동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비대면 진료를 전면 허용하기로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수련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한 전공의는 전날 오후 10시 기준 총 8897명(78.5%)으로, 실제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7863명(69.4%)이다.
#대한의사협회 #의협 #전공의 #집단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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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복건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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