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봉강리 민간인학살 유해 4구의 DNA 검사 과정과 결과

[다시 만날 그날까지 26] 진주 봉강리 2

등록 2024.02.29 13:56수정 2024.03.04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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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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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봉강 유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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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좌) 포크레인 메우기 작업 (중) 이덕원 연구원 토층 고르기 모습 (우) 발굴 후 술 한잔 올림 ⓒ 김영희


[이전기사]
가지런히 노출된 41구의 유해 행렬 https://omn.kr/27g99

유해발굴 현장 원상복구 모습

어느 지역이든 발굴 현장은 발굴 후 원상복구해야 한다. 대부분 발굴지가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또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발굴만 했다고 모든 해결된 것 아니다. 이곳은 바로 피학살자들의 합동 묘지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정부나 지자체는 발굴된 현장을 진실을 밝히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왜곡되고 은폐시킨 역사를 길이 보존해 후손들에게 알리고 다시는 암흑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발굴지를 보·관리하는 것은 머나먼 일인 듯하다.

2022년 7월 28일 봉강리 유해의 안치식 날

역사문화재연구원(이하 역문원)는 2022년 7월 28일 봉강리 유해의 세척과 감식을 마치고 명석면 용산리 425번지 컨테이너 임시안치소로 갔다. 경남 진주 유족들은 유해를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박스씩 컨테이너에 옮겼다. 유해 41구 중 우리 아버지와 형제일지도 모르는 유해이기에 장례식 지내는 마음으로 정성껏 예를 갖추어 안치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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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좌)봉강리 유해를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 (우) 컨테이너에 임시 안치하는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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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좌) 컨테이너 속 보관 (중) 필자와 연구원 유해 확인 (우) 안치식 제례 상 모습 ⓒ 김영희


진주 유족들은 진주형무소로 끌려간 아버지와 형제(보도연맹원)들이 당시 서부 경남 전역에서 잡혀 와서 학살당했으므로 부산과 각지에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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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진주 유족들 안치식 제례 모습 ⓒ 김영희

 
특히 참석자 중에서 눈에 띄는 분이 있다. 바로 진주시청 행정과 직원 노동환이다. 노동환은 담당 직원으로서 유족이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영혼들을 위해서란다.

보통 발굴 개토식과 위령제 또는 안치식 행사에 시장이 참석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진주지역은 아홉 번이나 발굴 사업을 진행했지만, 진주시장이 불참했다. 행정과 직원의 참석만으로 만족스러워하는 유족들의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아픈 역사 앞에 지자체 단체장이나 시의원들이 앞장서도 시원찮은데 뒷짐만 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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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좌) 진주시청 행정과 노동환 주무관 (우) 안치식 마친 후 마무리 정리하는 고령의 유족들 모습 ⓒ 김영희


이제는 위령제도 유족만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라 '한국전쟁기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국가기념일'로 정해 국가 차원에서 온 국민이 기리는 행사가 되길 바란다. 필자는 행사를 마치면 항상 컨테이너 유해와 발굴장에 인사하는 말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벌노랑이꽃)을 연상한다.

역사문화연구원 이덕원 연구원과의 인연


이번 봉강리 발굴장에서 만난 이덕원 연구원(과학수사학과)은 필자에게 소중한 만남이었다. 그동안 발굴 자원봉사를 다녔지만, 과학수사학과 전공자를 만난 적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연구원을 만난 것이다. 이 연구원은 유해를 보는 시각과 유해에 대한 지식이 깊고 풍부했다. 유해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아주 기쁘고 보람 있었다. 안치식이 끝난 후 이 연구원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봉강리 발굴 직후 일부 DNA 감식을 진행할 예정이란다.

그동안 현실적으로 발굴 직후 DNA 감식이 진행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유해 발굴의 목적은 유해를 가족의 품에 안겨주는 것이다. 정확한 개인 신분을 알려줄 수 있는 유품이 함께 발견되는 극히 드문 상황을 제외하고는 유가족은 계속 진행되는 발굴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발굴이 무사히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이미 일부는 세상 밖으로 나와 우리 곁으로 돌아왔지만, 누구의 가족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 또한 유족을 애타게 하는 일이 현실이다. 유족들은 70년 넘게 숨죽여 살아왔기에 감히 발굴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모양새다. 그러니 유전자 검사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필자는 몇 구의 유전자 검사이지만 이번 일이 상당히 고무적이라 여겼다.

처음 접해보는 유해 시료 채취 과정 

필자는 이 연구원을 만나 진주 명석면 컨테이너로 향했다. 유해 시료 채취하는 과정을 처음 경험하니 궁금하고 설렜다.

먼저 가장 양호한 유해와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유해 그리고 보통인 유해 세 분류로 나눠 선택한다고 한다. 특히 건강한 유해 부위는 정강이뼈라 한다. 선택한 유해는 핸드그라인더로 조각 하나하나 자른다. 유해를 자르는 순간 유해 가루가 안개처럼 뿌옇게 품어 나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컨테이너 속에서 유해를 채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유해가 타는 누린내도 함께 난다. 유해 타는 냄새가 이렇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유해 타는 냄새를 정말 모르고 살았다. 가령 밀양편에서 약산 선산에 4형제와 함께 묻은 합동 묘지(330여구)를 5∙16 쿠테타 시기에 화형 했을 때 동네 주민들에게 몇 날 며칠 유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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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이덕원 연구원 유해 상태 확인?유해 시료 채취 작업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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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유해 시료 채취 작업 함께하는 필자 모습 ⓒ 김영희


한편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책 속에서 봤던 "독일 나치들이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태워죽일 때 가스실 주변 하늘은 매일 같이 뿌연 연기로 뒤덮여 맑은 하늘을 하루도 볼 수가 없었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의 말이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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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중간 상태 유해 (2구)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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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좌) 상태가 안 좋은 유해(1구) (우) 보통 유해(1구)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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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양호한 유해 (정강이뼈) 모습 ⓒ 김영희


이 연구원은(사진9) 채취한 유해를 자세히 보여주면서 설명해 준다. 직사각형으로 자른 뼈 속살 하얀 부위는 강철보다 더 강하고 쇳덩어리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이후 ​​4시간 이상에 걸친 작업이 끝난 뒤에야 컨테이너에서 내려왔다.

역사문화재연구원에서 유전자 감식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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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좌)역문원 김헌 원장, (중)이덕원 연구원, (우) 성균관대 임시근 교수 ⓒ 역사문화재연구원


필자가 10년 넘게 발굴 봉사를 다녔지만, 발굴보고서에 "유전자 검사를 해 유족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단, 마산 여양리 발굴보고서(경남대 이상길 교수)에서는 유전자 검사를 해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전자 검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유해를 아세톤으로 세척 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동안 필자가 10여 년간 발굴 후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단, 유족이 유전자 검사 비용을 부담한 사례가 있다. 바로 아산 설화산 유해 발굴 208구 중 미국에 사는 유족이 1구 유전자 검사를 요청해 검사한 결과 불일치로 판정됐다. 한국전쟁 전후 유해 발굴은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품과 유전자 검사를 연구와 데이터가 전무하다. 따라서 넓게는 전국 지역, 좁게는 진주지역의 유품을 종합해 분석하고 데이터를 축적해 관리한다면 민간인 유해 발굴에서 출토되는 유품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유품의 성격을 파악해 '피학살자의 신분'을 유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 된다.
 
봉강리 유해 DNA 검사 결과는?


건강한 유해와 약한 유해 그리고 중간 유해와 아세톤 처리한 유해 모두를 가지고 유전자 분석을 한 결과 네 유해 모두 유전자가 정확하게 나왔다. 그리고 세척 방법이나 화학약품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덕원 연구원과 성균관대학교 임시근 교수와 유전자 분석을 연구한 결과 미량에 상태가 좋지 못해 어려움이 있었으나 유전자 분석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굴 이후 아세톤 세척을 거쳐 안치 중인 유해들의 유전자 검출이 가능함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주1)

맺는말

이번 진주 봉강리 유해 발굴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진주시 예산으로 진행했고, 두 번째는 유해가 흐트러지지 않고 드러나 DNA 검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현재 진주 유족 인원 100여 명과 유해 41구를 DNA 검사하면 최소한 몇 구는 일치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72년 만에 유해가 유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경남도와 진주시는 관심과 예산 지원에 힘써주길 바란다.

유족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민단체가 2014년 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을 발족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10년째 접어들었다. 정부에서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속살을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진실은 언젠간 밝혀질 것이라는 명언에 걸맞게 수십 년간 은폐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뻔 한 전국 방방곡곡 위치한 매장지가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부도 더 이상 역사의 진실 앞에 막달은 길목에 섰다. 유전자 검사를 요구하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한 듯하다. 2023년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유해 3800여 구 가운데 대전 골령골 유해 1441구 중 시료 채취 가능한 1100여 구와 아산과 타 지역 1000여 구 시료 작업이 끝났다. 2024년에도 남은 지역 유해 시료 작업이 추진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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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 27화 닭족골 편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주1)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덧붙이는 글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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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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