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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노출된 41구의 유해 행렬

[다시 만날 그날까지 25] 진주 봉강리편

등록 2024.02.22 15:08수정 2024.02.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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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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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 맨 앞 필자의 모습(2022년 6월) ⓒ 김영희


[이전기사]
억울한 피학살자 '두 번'이나 죽인 박정희, 그 잔인한 흔적 https://omn.kr/27fo7

경남 진주지역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매장지 24개소 중 8개소를 발굴했지만, 지자체에서 발굴 비용을 지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22년도 진주유족회장(정연조)과 집행부의 진주시청 방문 등 노력과 진주시의 관심으로 5월 말경 예산이 집행됐다. 그렇게 해서 9개소째인 봉강리 유해발굴장은 2022년 6월 2일부터 23일까지 조사와 발굴을 14일간 실시하기로 했다.

진주시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반면 아프고 슬픈 역사, 암흑의 역사도 존재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 가운데 진주지역이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한 사람이 전국에서 가장 많다. 진주시가 좀 더 건강한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픈 역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청산할 수 있는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아픈 역사를 안고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유족들이 고령이고 1세대에서 부모와 형제들의 학살당한 억울함을 청산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이 사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진주시의 적극적인 관심이 있을 때 진주시민도 아픈 역사의 청산에 앞장서는 진주시 정책에 공감하고 지지할 것이다.
 
집현면 봉강리 '시굴 아닌 시굴'하는 날

 
2022년 6월 2일 집현면 봉강리 매장지로 향한다. 봉강마을 입구에서 장대산 북서 자락 능선 500m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10여 년 전 봉강리 마을에 사는 윤아무개씨 증언으로 전 진주유족회장 강병현과 유족들이 직접 매장지를 파보았다고 한다. 70cm 정도 팠지만 유해가 나오지 않아서 윤씨에게 유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윤씨가 직접 올라와 "더 파야한다카이 내가 그때 딱 본 기라 그래서 안다 아이가 1m 정도 더 파야 나온다니까"라고 했다.

다시 1m 정도 더 파니까 유해가 드러나서 확인 후 그대로 묻고 표지판만 세우고 난 이후 10여 년이 흐른 후 발굴하게 됐다. 그래서 시굴은 필요 없고 간단한 측량과 조사하는 날, 필자는 매장지를 찾아가기 위해 장대산 매장지 입구에서 유족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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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집현면 봉강리 발굴장 원경(사진제공 : 역사문화재연구원)과 표지석 ⓒ 김영희


장대산 매장지 입구에 도착하니 33번 국도 아래였다. 북쪽방향으로 집현면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유족들은 긴장과 착잡한 마음으로 장대산 매장지로 향했다. 필자도 뒤따른다. 유족들에게 '이곳에서 아버지가 학살됐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습니까' 여쭤보니 다들 한결같이 손과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 아니!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당했는지 전혀 모른다 아이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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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분들이 장대산 매장지로 향하는 모습 ⓒ 김영희

 
유족을 뒤따라 500m 정도 한참을 오르니 숲속에 표지판이 유족과 필자를 반긴다. 표지판은 훼손되지 않고 깨끗하게 매장지를 꿋꿋이 지키고 있어 짠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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꿋꿋이 서 있는 표지판 앞에서 유족들과 역사 문화재 연구원 김헌 원장과 대화하는 모습 ⓒ 김영희


봉강리 발굴은 유족에게 첫 기쁨
 
며칠 후 개토제가 시작됐다. 발굴 비용이 진주시에서 예산으로 지급됐기 때문이다. 10여 년간 알고 있으면서도 발굴도 못 한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던 유족들에게 단비가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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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유족들이 개토식 매장지를 향해 제례 모습 / 오른쪽 : 오른쪽에서 두 번째 MBC 이준석 기자, 네 번째 장상환 교수, 다섯 번째 성연석 전 도의원. 그 외는 유족임 ⓒ 김영희


봉강마을 사람들의 목격과 증언이 정확하지 않다. 몇 구가 드러날지 궁금하고 긴장되는 순간이 시작됐다. 며칠은 포크레인 작업을 해야 하니까 며칠 후 오라고 했다.

며칠 후 발굴장에 도착하니 필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한탄만 나온다. 그동안 다닌 발굴지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훼손도 덜 됐다. 개체수가 거의 육안으로 드러났다. 학살 과정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나란히 드러나 있었다. 유해는 72년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가해자들의 사살 과정과 사살 행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폭 1m 50cm, 깊이 1m, 길이 15m 긴 구덩이에 41명이 나란히 엎드린 상태였다. 가해자는 발 방향에서 일렬로 서서 머리를 향해 격발해 학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죽지 않았으면 권총으로 확인 사살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한 트럭 40~50명 정도 예측이 맞다. 권총 탄피와 칼빈 탄피로 보아 학살자들은 군인과 경찰로 추정된다. 탄피가 100여 개 이상이 나왔다는 것은 한 사람당 2발 이상을 쏘았다는 뜻이다. 

이름 모를 1번-2번 유해와 만나다

발굴장에는 규율이 있어 아무 곳에서나 발굴할 수 없다. 발굴단장이 지시한 곳aks 발굴을 할 수 있다. 김헌 원장이 필자에게 북쪽 위쪽에 있는 유해 1번, 2번(발굴장에서 정해지는 번호) 두 분을 발굴하라고 지시한다.

발굴 도구를 준비해 흙에 앉으면서 "안녕하세요. 저와 만나게 돼 반갑습니다. 어서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개요"라고 인사하고 발굴 시작한다.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두개골은 형태가 잘 드러나고 한 분은 총상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신체도 건장하고 장신이었고 치아 금니가 노출됐으며 한 분은 가슴뼈도 남아 있었다. 사실 가슴뼈와 좌골과 골반은 약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데 41구 중에서 유일하게 노출됐다. 목 부위를 계속 흙을 파니까 하얀 치아 와 금니가 살며시 보인다.

이후 검은 선이 살며시 드러났다. 계속 따라서 흙을 파니 기다란 전선이 확인된다. 손목과 손목을 결박한 상태는 2인 1조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수법인데 진주지역 발굴장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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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2번 유해 2인 1조 결박 상태와 골반 및 단추 노출 모습 ⓒ 김영희


골반 사이로 4혈 단추가 나온다. 여름이라 옷감은 흔적조차 없고 키가 장신이라 구덩이 폭이 좁아 발목이 접혀서 신발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니 학살 당시 발을 제대로 뻗지 못했던 것 같다.

1번, 2번은 신발도 검정 고무신이지만 구두형 즉 굽이 있는 고무 신발이다. 고급 신발과 금니, 치아 등 유품을 보니 부유층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유품은 학살당한 자들의 직업이나 신분, 성별, 연령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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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번 ②번 구겨지고 엉킨 신발 노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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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2번 유해가 묶인 전선과 금니 치아 노출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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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유해 세척 인골 평면도 (사진 제공: 역사 문화재 연구원) ⓒ 김영희


이번 봉강리 발굴 노출 현장에서는 유해 41구와 유품 416점이 발굴됐다. 필자는 한편 봉강리 발굴 현장을 보면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지역 매장지 24개소 중 12개소(명석면 10개소, 집현면 1개소, 수곡 1개소)가 구 진주형무소(상봉서동)에서 반경 20km 이내 위치한다. 명석면에서 발굴한 유해 중 봉강리 발굴장에서 드러난 유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 72년 세월 동안 매장지가 훼손되지 않고 원상 그대로 존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외 3개소에서 발굴된 유해는 뒤섞어 노출됐기에 DNA 검사가 불가능했다. 봉강리 발굴지는 DNA 검사도 가능한 형체로 드러났기 때문에, DNA 검사 통해 유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실체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발굴지라 할 수 있다.
 
봉강리 매장지에 묻힌 피학살자들은 누구인가
 
1950년 7월 21일~26일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기간이다. 봉강리 매장지는 학살 당시 용수를 쓰고 올라왔다는 증언도 했지만, 유골과 유품을 검토 확인한 결과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 현장이라 전문가는 판단했다. 일부는 출퇴근이나 등하교길에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유해 41구가 확인됐고 두개골이 39점, 유품 416점이 발굴됐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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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 유해 41구가 가지런히 노출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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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조 유해는 훼손되지 않고 노출돼 DNA 검사가 가능하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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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① 사진 12-② 사진 12-③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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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④ 사진 12-⑤ 사진 12-⑥ ⓒ 김영희


봉강리 발굴장에서의 노출된 유품들

사진 12-①은 양은그릇과 빗 그리고 전선 흐트러진 유해와 함께 노출된 모습이다. 빗은 미군의 제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때 참빗 정도 사용할 때다. 12-②는 약병 종류다 당시 약병도 중요한 단서다. 12-③ 버클과 단추도 고급스런 쇠로 만든 큰 단추다. 12-④ 옷감은 당시 7월이라는 날씨와 맞지 않은 두툼한 옷을 입은 채 확인됐고 12-⑤ 미군복 색상의 옷은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군 제품이 통용돼 한국인이 구입해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주3) 12-⑥ 두개골의 훼손 상태가 심하고 손목뼈 옆에 손목을 결박한 전선이 노출돼 있다.
 
봉강리 발굴장의 유품 중 특별한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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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이리공업고등학교 교복단추 / 가운데 : 가쿠란 깃 노출 사진 / 오른쪽 역사문화재연구원 사진제공 ⓒ 김영희


"이공(理工):이리공업고등학교'이란 한자가 새겨진 단추와 '가쿠란'이란 교복 상의 깃 속에 넣는 제품이 출토됐다. 가쿠란이 출토됐을 때는 어디에 사용된 유품인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단추와 결합해보니까 당시 일제식 교복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단추의 단서를 찾기 위해 '이리공업고등학교 22회 졸업생 정유순씨를 통해 이리공업고등학교 총동창회에 문의한 결과 1940년대에 입던 교복 단추가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 당시 이리고는 명문학교로서 전국에서 유학 갈 정도로 유명한 학교였다고 한다. 단추와 가쿠란이 출토된 유해(07)의 신발과 운동화였다. 그러므로 학생 신분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품이 진주 봉강리에서 발굴된 것은 정확한 사유를 알 수가 없다. 진주에 거주하는 학생이 이리고에 진항해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서 잡혀 학살됐는지, 아니면 이리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이 끌려가서 학살당했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연령이 대략 10대~30대 정도가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주4) 안치식날 원장이 진주유족 중 1950년 당시 익산(옛지명 이리)에 살았거나 친척이 있으신 분을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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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군용품 신발류 발굴 모습, 두개골 총상과 치아, 철제단추 4열 노출 ⓒ 김영희


다음 유품은 신발류이다. 사진13 에서 보듯이 구두와 미군 전투화 등이 발굴됐다. 그중 각반이 발굴됐는데 이것도 발목을 고정시키는 미군 제품이라고 한다. 신발 속에 발가락뼈가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미군 제품을 사용할 수 있었던 계급층은 부유한 가정의 자녀나 가족일 것으로 추정한다.(주5)

집현면 봉강리 발굴은 16일 만에 막을 내리고 세척과 감식을 위해 역사문화재연구원으로 이관됐다.

(* 26화 진주 봉강리편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주1)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2)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3)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4)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주5) 〈역사문화재연구원〉, 한국전쟁기 진주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조사 보고회 자료집, 2022.6.16.
덧붙이는 글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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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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