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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반란 도왔는데 버젓이 현충원에... 씁쓸한 현실입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12.12와 현충원⑤ 보안사 밖 조력자들

등록 2024.01.22 10:30수정 2024.01.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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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인의 12.12 군사반란 관련 신군부 인사들의 육사 기수, 당시 계급, 생존 여부 및 안장정보.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김기택, 박준병, 송응섭, 김택수 ⓒ 정성일


[이전기사] 육사 11기 전두환은 왜 반란에 선배들을 끌어들였나 https://omn.kr/272kf

12.12 반란군들의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34인 가운데 10명은 보안사령부 소속이었고 나머지 24명은 주로 하나회 소속으로 직속 상관보다 하나회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보안사 밖 조력자들은 장세동이 이끄는 30경비단에 모여 반란을 주도하고, 자신의 부대를 움직이며 신군부의 반란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의 군부 장악 이후 회유에 돌아서 신군부의 편에 서서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화 <서울의 봄> 속 20사단장 김병준(배우 공재민)의 모티브가 된 박준병 소장,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박기택(배우 이기훈)의 모티브가 된 김기택 준장,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강 실장(배우 임철형)의 모티브가 된 정동호 준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그리고 71훈련단장 조우택(배우 권혁)의 모티브가 된 백운택 준장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위 사진에 등장한 30사단 90연대장 송응섭 대령, 606부대장 김택수 중령 또한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6명의 보안사 밖 반란군들이 대전과 서울의 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무죄를 받은 12.12 반란 지도부이자 광주학살오적, 박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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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383호에 안장된 박준병 ⓒ 정성일

 
장군2묘역 383호에 안장된 박준병은 육사 12기 출신의 하나회 멤버로 5공화국과 그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서울의 봄>에서 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5공화국에서 그의 지분은 상당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보안사령관을 지냈으며 대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1985년부터 국회의원 선거에 내리 3선에 성공하며 그의 고향 옥천에서는 노태우를 이어 대통령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그는 1979년 12월 12일 당시 30경비단에 모인 반란 지도부였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20사단은 충정부대로 대정부 전복 시도를 진압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나 반대로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지휘한 20사단은 1980년 5.18항쟁 당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박준병은 5000명가량의 군인을 투입해 송암동 학살사건, 국군통합병원 확보와 광주-목포간 도로 차단 과정에서 자행한 민간인 살상 등을 자행했습니다. 그 잔인함이 심해 광주, 전남 출신의 20사단 장병이 휴가를 나올 때면, 사단 마크를 떼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박준병의 악행은 1981년에도 이어졌습니다. 보안사령관이 된 그는 대학생들 머리에 든 빨간 물을 파란 물로 바꾼다며 '녹화사업'을 실시했습니다. 학생운동에 가담한 대학생을 강제 휴학시켜 입대시켰으며, 휴가를 나올 때면 학생운동을 감시하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했습니다. 녹화사업 피해자들은 당시 군 내에서 의문사를 겪기도 하였고, 생존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고문 후유증이나 프락치 활동의 죄책감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악행에도 그는 어떻게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1996년 내란수괴 재판을 받은 16인 가운데 유일하게 무죄를 받았기에 현충원에 안장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받은 이유는 12.12 당시 20사단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란을 지휘했고, 하나회 핵심 멤버였으며, 광주학살 책임자이고, 녹화사업 가해자였습니다.
  
직속 상관을 배신한 전두환의 동기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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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25호에 안장된 김기택 ⓒ 정성일

 
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 125호에는 김기택이 묻혀있습니다. 육사 11기로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였던 김기택은 당시 준장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반란군 진압에 앞장섰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참모장이었기에 박동원 작전참모보다 더 측근에서 장태완 사령관을 보좌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신군부 반란 초기, 김기택은 30경비단에 수경사 수하인 장세동, 김진영, 조홍을 비롯한 반란군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알고 장태완 장군에 보고하는 등 장태완 장군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동기였던 그는 전세가 반란군 쪽으로 기울자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배신했습니다. 훗날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수기에 따르면 반란군인 1공수여단이 서울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행주대교를 건너와야 하는데 장 장군의 검문소 접근 병력 발포 명령을 어기고 김기택 참모장은 검문소에 저항하지 말라 지시를 하였습니다. 덕분에 1공수여단은 손쉽게 서울에 진입했고 신군부의 반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회도 아니고 뒤늦게 반란군에 합류한 김기택은 1공수여단의 진입을 방관한 공으로 12월 14일 보안사령부 앞에서 반란 성공 기념사진 촬영에 함께했습니다. 그가 반란군에 합류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던 그 시간 그의 상관이었던 장태완 사령관은 반란군에게 체포돼 보안사 서빙고 분실 지하에서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강제 예편당할 때, 김기택은 소장으로 진급해 제25보병사단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국방대학원장, 태평양 건설 사장, 제일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 자리를 거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 2010년 6월 18일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25호에 안장됐습니다. 약 한 달 뒤 사망한 그의 상관 장태완 사령관은 김기택의 묘 근처인 132번 묘지에 안장돼 있습니다. 김기택은 상관을 배신하고 반란군에 합류했지만, 1996년 12.12 반란 재판에는 기소되지 않았기에 2010년 사망 이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감금한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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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64호에 안장된 정동호 ⓒ 정성일

 
<서울의 봄>을 보신 분이라면, 한남동 총리공관에서 전두광을 반기던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강 실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의 모티브가 된 정동호 준장은 10.26으로 경호실장 차지철은 사망하고, 경호차장 이재전과 경호차장보 김복동은 구속과 좌천되면서 경호실 4인자였지만, 경호실장 직무대리가 됐습니다. 육사 13기로 하나회 멤버인 전두환의 후배인 그는 대통령을 경호해야 하는 직책에 있었음에도, 총리공관 헌병들은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감금한 공으로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식 경호실장을 지냈으며, 5군단장과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으로 예편되지만, 바로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맡았고, 13대, 14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전두환의 반란을 도왔고, 5공화국에서 권세를 누렸지만, 그 또한 12.12 반란 재판에 처벌되지 않았기에 2009년 3월 26일 사망 후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64호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기념사진 속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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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22호에 안장된 송응섭(좌)과 120호에 안장된 김택수(우) ⓒ 정성일

 
이들 외에도 12.12 반란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송응섭(장군2묘역 222호)과 김택수(장군2묘역 120호)는 대전현충원에, 백운택(제1장군묘역 133호)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송응섭은 육사 16기로, 12.12 반란 당시 30사단 90연대장으로 사단장 박희모의 명령을 받은 뒤 100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고려대학교로 진주해 반란군의 보호막을 쳤습니다. 그 공로로 51사단장, 7군단장, 합동참모본부장, 합동참모본부 제1차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다 대장으로 예편했습니다. 그는 12.12 반란으로 고소되자 장태완, 김진기 장군을 맞고소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2.12 당시 606부대장이었던 김택수는 사진에 보이듯 유일하게 양복을 입고 있는 자입니다. 606부대는 청와대 경호실 소속의 비밀리에 운용되던 부대이기에,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606부대는 10.26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의 경호를 맡았습니다. 그 공으로 13공수여단장, 17사단장 등을 거쳐 제3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예편했습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 인천 남동구을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2010년 4월 12일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71훈련단장이었던 백운택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예하 부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육사 11기이자 하나회 멤버였던 그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그 공로로 노태우에 이어 9사단장이 됐습니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해 1군단장이 되며 승승장구했으나, 1982년 11월 3일 사망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그가 살아있었으면, 12.12 반란 재판을 받았을 것이나, 이미 사망했기에 재판을 받지 않았고,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12.12 반란군들 가운데 보안사 밖 조력자들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부하도 있었고, 이건영 3군사령관의 부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회에 충성하거나 본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군인으로서 사명을 저버리고 반란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반란 이후에는 실제로 고속 승진하고,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런 자들이 무죄를 받거나 재판을 받지 않아 죽어서도 현충원에 편히 안장된 현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참고자료]
장태완, <12·12 쿠데타와 나>, 서울: 명성출판사, 1993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박준병 #김기택 #정동호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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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기획홍보팀장, 유튜브 대전통 제작자, 前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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