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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벽, 경계의 시간에서 만난 엄마의 우주

작가 정우미 개인전 <하얀 새벽 ( . ) ㄴㅜㄴ맞추ㅁ> 30일까지

등록 2023.12.20 14:47수정 2023.12.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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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새벽, 한 여성은 아기를 안고 신림동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그 언덕 거의 꼭대기, 벽에 작게 나 있는 문을 열고 우는 아기를 누인다. 우는 아기를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데 교회 안쪽에서 다급한 걸음으로 나온 목사가 편지를 쓰고 가기를 제안한다. 여성은 몇 줄의 글을 남긴 후 다시 언덕을 내려간다. 아기를 낳은지 사흘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것은 입양모이자 작가인 정우미가 베이비박스 아동 생애 초기의 일반적인 모습과 본인의 아기에 대해 남겨진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건조하게 상상, 편집해본 그날의 이야기이다.
 
하얀 새벽,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 혹은 시선의 경계

정우미는 새벽을 포착한다. 새벽은 친생모가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데려다 주고 떠났을 시간과 입양모가 뜬 눈으로 아기와 밤을 지샌 시간이 중첩된 곳이다. 


밤새도록 우는 아기를 둘러업고 작업에 관한 파편적인 생각을 짚어내다 남긴 메모에는 '하얀 새벽 ( . ) ㄴ ㅜㄴ맞추ㅁ'이라고 적혀 있다. 이 메모는 오타를 포함하고, 괄호 안의 점은 아이폰에서 띄어쓰기를 두번 했을 때 자동으로 생성되는 점이다. 

11kg의 아기를 업고 풀려가는 팔 힘에 정신력을 보태가며 생각의 파편을 빠르게 남긴 흔적인 것이다. 사유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남기고 시각화한 것이 <하얀 새벽 ( . ) ㄴ ㅜㄴ맞추ㅁ>이라는 전시로 공개되었다.
 

이 전시는 입양 맥락 속 정보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전지적 시선에 대한 갈망을 시각화한다. 그녀는 자신이 입양모로서 고민하고 겪는 경험을 화면 위에 감각적으로 발현시키며 "결코 함께 놓인 적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겨진 적도 없었던 것들의 함께 놓기"를 실천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자는 '치안(police)'이 아니다. 이 전시는 사회의 갈등 상황을 짚어내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 내려가는 '정치(politique)'로서 내딛는 한걸음이다. 

그녀의 정치적 실천은 우리 각자가 사회에서 점유하는 시공간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몫 없는 자의 자리를 재배치하는 틈을 여는 장소로 기능한다.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경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경계를 짚어낼 뿐이다. 이 작업이 사회가 돌보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경계를 짚어낼수록 사회가 배제한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난다. 알면 알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사각지대는 넓어진다. 우리 사회가 모른 체 하고 지나간 사람들, 공간, 개념 등. 할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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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미 개인전 <하얀 새벽 ( . ) ㄴ ㅜㄴ맞추ㅁ> 중 <2022/8/15-2022/8/18>, 서울문화재단 후원. ⓒ 정우미

 
전지적 시선에 관한 갈망에 대한 인정

"입양 삼자의 관계는 정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입양인이 입양 부모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간, 가족력 등은 미지의 영역이다. 특히 베이비박스 아동의 경우 다른 입양 아동에 비해서도 친생모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더더욱 제한적이다. 미지에 관한 불안은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든다. 불안을 촉발시키는 것에 저항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의미를 부여했었다."
 
정우미에게 사마귀는 전지적 시점에 관한 환상의 매개체였다. 아기가 태어나고 베이비박스에 갈 즈음까지의 시간 동안 작가 부부의 차에는 사마귀가 달라 붙었다. 입양하게 될 아기의 생일과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놓이게 된 날을 알게 된 작가는 사마귀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오는 날 도로를 달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사마귀를 통해 나와 아기와 친생모가 애초에 연결되어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신이 났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통해 나와 아기와 친생모를 연결하는 전지적 시선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갈망이 신성화 되고 동시에 친생모에 대한 낭만적 공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제동을 걸었다. 낭만적 공상은 또 다른 시선의 폭력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보고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들여다봐야 보인다고 하지만 들여다봐도 안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입 안으로 불러오는 미지의 시간

전작 영상 <상자 속 상자>에서 정우미는 "많은 친생모들이 다녀갔을 길에 반복적으로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보이지 않는 것에의 노크이고, 보이지 않던 것을 형식적으로 가시화하는 행위였다. 드러냄을 통한 본래적 삶을 제안하는 것이었으나, 입양모와 친생모간의 비대칭성이 끊임없이 상기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제작하게 된 영상 <상자 속 상자 2>에서는 한 아기를 교차점으로 두고 있는 엄마들이 입을 맞대고 숨을 주고받음으로써 각자, 서로의 미지의 시간을 공명시킨다. 영상은 "주고 받는 숨으로 부푼 볼 안 공간은 사회가 지워낸 곳. 거기에 엄마들의 우주가 있었다. 만난 적 없는 엄마의 우주도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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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미 개인전 <하얀 새벽 ( . ) ㄴ ㅜㄴ맞추ㅁ> 전시 전경, 서울문화재단 후원. 12월 30일까지. ⓒ 정우미

 
'청사진을 그린다'

청사진(靑寫眞). 우리는 때때로 '청사진을 그린다'는 말로 미지의 영역으로서의 삶에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구상한다. 정우미가 활용하는 청사진(시아노타입)은 아이의 친생모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의 시각적 형상화다. 

그 어느 것도 선명하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데려다주고 내려가는 친생모의 형언 불가능한 마음, 친생모를 위로해 줄 익명의 존재에 관한 소망, 떠나보낸 아이에게 묶인 삶이 아닌 그 이후의 친생모의 삶에 관한 정우미의 기도가 청사진의 의미를 관통한다.
 

"사진의 한자를 풀어 쓰면 '그대로 베낀다(寫眞)'는 의미가 된다. 작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챗GPT를 통해 얻은 이미지로, 전시장에서 보이는 여성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다. 사진은 여성들의 외형을 그대로 베끼기 위한 형식이라기 보다 챗GPT에 반영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사회적 비존재들을 설명하는 언어가 부족하다는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는 매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정우미 작가는 '입양'과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발생하는 비가시화된 존재에 관한 시선을 고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쩜 나의 작업은 내 나름의 임의적인 상상일 뿐 이를 뺀 이외의 공간과 서사가 진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본 전시는 우리 사회가 표방하는 이미지에 담기지 못한 파편들을 가시화 시키며 우리 사회의 진짜 초상을 비추는 조각난 반사경의 역할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시선을 놓는 환유가 개인과 다수의 셈을 어떻게 뒤엎을 수 있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얀 새벽 ( . ) ㄴ ㅜㄴ맞추ㅁ'을 통해 삶의 곳곳에서 무수히 맞닥뜨리는 시선의 경계를 확장시켜 보길 바란다.

해당 전시는 전시공간(서울시 마포구 홍익로 5길 59, 1층)에서 30일까지 열려 있다
(월요일-토요일 10시-18시). 서울문화재단 후원.
#정우미작가 #입양아 #전시 #베이비박스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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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언어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다. 움직임의 예술적 치환 가능성에 관해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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