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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동안 이어진 특별한 사제의 정

친구의 오랜 스승을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 오래오래 곁에 계셔 주세요

등록 2023.09.20 10:54수정 2023.09.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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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권이 땅에 떨어져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지어 이를 감내하기 힘든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잦아지자 교권 회복을 위하여 관련법 제정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교권의 추락이 어느 한 가지 이유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개성과 자율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가치관, 정서의 변화 등 여러가지가 복합하여 비롯된 만큼 그 해결 또한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교권이 하늘에 맞닿을 만큼 높은 장면을 보고 느꼈다. 옆에서 바라만 보아도 흐뭇하게 진한 감동이 그야말로 물밀듯 밀려드는 현장이었다.

지난 금요일 연차를 내고 2박3일 광주 여행을 했다. 하필 여행이 4일간의 철도 노조 파업과 겹쳐 예약한 KTX 고속열자 운행이 취소되어 고속버스를 타고 오느라 시간이 2배로 걸렸다.

음악실을 운영하는 친구의 친구네로 벌써 두 번째 나들이다.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았다가 급하게 내려왔지만 지난 여행 때 벌써 여러 밤을 여기서 지낸 터라 이 음악실은 나에게도 이미 익숙한 장소다.

층고 높은 상가의 계단을 올라 음악실에 들어섰다. 드럼이 중앙에 있고, 양 옆으로 커다란 스피커. 그리고 기타, 건반, 저쪽으로 아코디언, 첼로 등 악기. 3년 전과 조금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더 반갑고 친숙하다.


3년 전 어느 여름 밤처럼 오늘 저녁에도 4층 음악실 옥상에서 스승님을 위한 작은 잔치가 열린다. 아마 오늘 모이는 구성원이나 인원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친구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과 친구 두 분, 친구의 동창, 음악실지기,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가 내가 예상하는 참석 인원이다.

백화점에서 세 분께 드릴 작은 선물을 사고 잔칫상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을 보았다. 옆에서 보면 정말 바쁘게 사는 친구인데 55년 전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정이 얼마나 돈독하면 그 바쁜 와중에 귀한 시간을 내 이런 수고로움을 기꺼이 즐길 수 있을까. 더구나 은사님 뿐 아니라 은사님의 친구분까지. 고물고물 사는 나로서는 사제간의 그 길고 깊고 단단한 인연의 고리가 그저 놀랍다.

손이 빠른 두 친구 덕분에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이 친구들은 얼마나 손놀림이 빠르고 무엇이든 빠르게 흡수하는지 습득력이 한정 없이 더딘 나로선 도저히 따라가기 버거운, 요즘말로 넘사벽이다. 함께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나의 무디고 더딘 학습 능력이 비교되어 의기소침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조차 무뎌진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까?

내가 이런 쓸데 없는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친구의 동창이 왔고, 이어 세 분의 선생님들이 오셨다. 역시 내가 예상한 참가 인원 그대로다. 선생님은 여전히 강건하셨다.

그 많은 계단을 연세가 가늠되지 않을 만큼 꼿꼿한 자세로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셨다. 감사하게도 스승이신 담임 선생님은 거의 나를 준제자로 받아주셨고, 친구분들 역시 광주인의 자리에 생판 외지인인 나를 끼워주셨다. 

두 번째 본다고 지난 번보다 더 반갑게 맞아주신다. 게다가 한 분 선생님은 어느새 글 쓰는 나의 서재를 찾아서 내 글을 많이 읽으셨나 보다. 읽어주신 것으로도 감사한데 과찬의 말씀까지 덧붙이시니 살짝 부끄럽다. 시를 쓰시는 선생님, 그림을 그리시는 선생님. 나도 나이를 먹으며 저렇게 익어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를 안 써와서 남아서 쓰고 가라고 했더니 해가 지도록 한 글자도 쓰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친구. 제목만 쓰라 해도 안 써서 할 수 없이 퇴근하시려고 그냥 보내셨다는 일화를 들려주시며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신듯 "얘가 그런 애였어" 하고 귀여운(?) 푸념을 하신다. 

이렇게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가 무르익자 당최 말씀이 없던 화가 선생님이 일어나 한 말씀 하신다. 저녁노을 어스름한 옥상 이 자리에 이런 제자가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그 사이로 살포시 비치는 빛이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너무 좋으시단다. 감성이 얼마나 풍부하신지 말씀 끝 목소리가 출렁이신다. 그래서 내가 덧붙였다. "선생님, 거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정情도 있어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이어지고, 사제 간의 존경과 사랑이 이어지고, 그 안에서는 60대 중반의 친구들이 금세 초등학생도 되었다가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며 현실 속의 시공간을 초월한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지만 두 분 선생님은 더 늦으면 사모님께 꾸중 들으신다는 농담을 남기고 자리를 파하시고, 우리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흥겨운 마음을 안고 다음 장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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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친구 ⓒ 홍미식


밤길이 조심스러워 구순을 향하고 계신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친구의 뒷모습이 너무 예쁘다. 뒤를 따라 걷자니 그 뒷모습이 다시금 나를 상념에 젖게 한다. 반세기를 넘게 이어지는 사제간의 정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나뿐 아니라 평생을 교직에서 보내신 두 친구 선생님도 감동하는 대목이다.

물론 지금도 동료교사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두 선생님의 증언에서 선생님의 성품을 짐작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전근 가실 때 그 학교까지 쫓아갔었다는, 그래서 그 학교와 친구의 학교가 자매결연까지 맺었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들었다. 

이어 노래방을 예약한 다른 제자를 포함한 3명의 일행이 선생님을 모신 자리에 합류했다. 말하자면 스승을 모시는 제자들의 즉석 사은 축하연이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셔서 3번 모두 100점이라는 전후무한 기록을 남기셨다. 역시 노래 실력도 살아 있는 선생님, 이쯤되면 가수 겸업도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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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 홍미식

 
사제간의 정, 어릴 적 친구와의 우정이 진하게 어우러진 흥겨운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이 자리를 뜨시기에 앞서 제자들의 스승의 날 합창이 이어졌다. 노래방에서 스승의 날을 부르다니, 또 스승의 날 노래가 있다니 모든 게 놀라웠다. 

그냥 이렇게 선생님을 뵐 수 있게 건강하셔서 감사하다는 이들.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도록 오래오래 건강해달라는 이들ᆢ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사랑~"

선생님을 둘러싸고 서서 노래를 부르는 이 제자들. 초로로 접어드는 머리 희끗희끗한 제자들의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 모습이 그려지며 마침내 본 적도 없는 어린 친구들의 3학년 모습이 내 눈에는 보였다.

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
광주의 이 밤이 더욱 아름답다.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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