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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 주64시간 노동, 기가 막힌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가 본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 대국민토론회'

등록 2023.02.28 10:25수정 2023.02.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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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섭 고용노동부 차관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열린 근로시간 제도개편 대국민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4일 정부가 '근로시간 제도개편 대국민 토론회'를 열었다. 지난해 12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발표에서부터 예견됐던대로, 정부는 결국 장시간 노동을 합법화하는 개편 방안을 내놨다. 고용노동부가 그 근거로 '글로벌 스탠더드'와 '노동시간 선택권' '건강권'을 든다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귤이 강을 건너 탱자가 된다더니, '글로벌 스탠더드'와 '노동시간 선택권' '건강권'이 고용노동부에 가서 엉터리가 됐다.

권기섭 고용노동부차관은 이날 '글로벌 스탠더드'는 노동시간 관리단위를 분기, 반기, 연단위로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노동시간 규제가 경직성이 크다고 발언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호도하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호도하는 발언이다. 유럽 나라들이 노동시간 관리단위를 4주에서 수개월까지로 하는 것은, 그들의 노동시간 기준이 40시간 혹은 48시간으로 추가적인 주당 연장노동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4개월을 관리기준으로 하지만 평균 주 40시간을 넘으면 안 되고, 영국은 17주 평균을 내지만 주당 48시간을 넘으면 안 된다.

이미 주당 12시간 즉 법정 근로시간의 30%에 해당하는 연장근로가 가능해 엄청난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 노동시간 법제에서 노동시간 관리단위를 연장하고, 유연근로제 사용을 좀 더 활성화하겠다는 말은 사업주들이 노동자의 몸을 고무줄로 보고 마음껏 편하게 사용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렇게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길을 열어줘야 하는 이유로 차관씩이나 되는 인사가 드는 이유가 '원청의 긴급한 추가 발주, 중요한 업무 보고, 신상품 출시'라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 너무나 분명해서 할 말을 잃게 한다. 

만성과로 기준이 12주 평균 60시간인 건 왜 이야기하지 않나


또한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4주 평균 64시간'이라는 과로사 기준을 들먹이는 것도 기가 차다. 과로사 인정 기준은 말 그대로 과로사 인정 기준이다. 적당히 일하는 노동시간의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는 넘으면 안 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어느 때부터인가 많은 직종의 최고임금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이제 과로사 인정기준이 노동시간 규제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인가?

만일 과로사 인정기준을 적용한다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현행 만성과로 기준이 12주 평균 60시간이라는 것은 왜 얘기하지 않는가? 토론회에서 발표된 노동부 안에 따르면 6개월간 매주 60시간 넘게 일하는 것도 '합법'이다. 

'건강권'을 보장한다면서 제시했던 근무일 사이의 11시간 휴식 의무마저 경직적이라며 완화하겠다는 데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 저들이 말하는 근무일 사이의 11시간 휴식이, 0시부터 24시 사이의 11시간 휴식이 아니라는 것만 분명히 하자. 14시간, 16시간, 18시간 일하고도 11시간 뒤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완화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의사가 되고 인턴으로 일할 때 12시간 근무, 12시간 휴식 스케줄로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주야 교대로 일한 뒤 한 달만에 4kg이 빠졌다. 이제 이런 스케줄이 일부 직종이 아니라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한 달이 아니라 수개월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연차조차 쓰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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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열린 에서 이지영 고용노동부 임금근로시간과장(오른쪽 두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용노동부 임금근로시간과장이 말한 '휴가 문화'와 '휴식권'도 기가 막힌 얘기다. 휴가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문화가 노동자 탓인가? 지난 25일 노동자 건강권 포럼에서 발표한 이주 여성노동자는 '연차는 회사에 일이 없을 때 쓰는 것'이라고 설명한 사장이 운영하는 인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연차는 일이 없을 때 업무량 조절용으로 사용된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임금 때문에 연차 사용을 기피하는 것 역시 '휴가 문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태평하다. 누구 말대로 휴가를 가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에서,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휴가도 사치이기 때문이다.

근로시간저축계좌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에서 지속적으로 시도됐지만 연차휴가도 제대로 소진하지 못 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고, 회사가 원하는 시기에 강제로 연차를 사용해야 하는 현실에서 근로시간저축계좌제는 연장수당 회피 용도로 악용될 뿐이라는 논리로 여러 차례 폐기됐던 내용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시간 대신 더 긴 휴가와 휴식,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기를 바란다면, 저임금 장시간 노동구조를 어떻게 해소해나갈 것인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결정권을 어떻게 높일지를 제안해야 한다.

한편, 임금근로시간과장은 징검다리 휴일에 단체로 쉬는 등 '눈치 보지 않고 쉬게'하는 문화를 강조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마트 노동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일요일에 쉴 수 있게 해달라는, 일요일 의무휴업제를 폐지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대구광역시 등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여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일요일에서 평일로 전환시키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말하는 눈치보지 않고 휴가 쓰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저들이 말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상위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노동부의 노동시간 제도 개편이 상위 노동자들에게 기쁜 소식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노동부는 그동안 노동시간 규제가 전혀 적용이 되지 않던 1차 산업 노동자들과 감시단속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규제를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면서 여기에 슬쩍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에 대해 노동시간 적용 제외를 검토하는 방안을 끼워넣고 있다.

역시, 한국보다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 비율이 훨씬 낮은 일본과 미국에서도 전문직의 과로(사)를 조장하는 법률이라고 문제제기가 많았다. 이미 변호사, 의사, 금융종사자 등 고소득 전문·관리직의 과로사가 많은 한국에서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라 하여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보호의 필요가 없을까? 

정부가 나서 저출산을 부채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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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9일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영등포구 남다른감자탕 서울영등포점에서 열린 오찬 간담회에서 중소기업 대표 및 근로자들을 만나 추가연장근로 유효기간 연장 등 근로시간제도와 관련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게다가 이는 저출산을 더욱 부채질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많은 전문직 커리어가 너무나 탐욕스럽게 '가차 없는 밀도로, 불규칙한 일정에 대응해가며, 장시간 일할 것을 요구'하고 그 대신 이전보다 훨씬 높은 보수를 지급한다(<커리어 그리고 가정>, 클라우디아 골딘, 생각의힘, 2021).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는 이런 일자리의 보수만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다른 일자리의 임금은 정체돼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출산은 미루거나 계획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육아와 이런 탐욕스러운 노동시간에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을 지경까지 많이 일한 대가로 고소득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주 40시간 일하고도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는 사회다.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개편안은 노동자의 '건강권'은 침해하고, 오직 자본과 사업주의 '노동시간 선택권'만 보장하며,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역행하는 엉터리 정책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토론회에 불참한 것은 도저히 이 엉터리 정책에 장단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토론회에 불참하는 것을 넘어 이 엉터리 정책을 막기 위한 행동이 필요한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최민씨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로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노동시간 #고용노동부 #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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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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