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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억울했는데... 화날 때 '이걸' 하니 달라졌습니다

[모욕에 맞서는 법] 배우지 못한 분노 사용법... 분노를 생산적인 감정으로 만들자

등록 2022.04.15 14:30수정 2022.04.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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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난 '따귀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탈모로 삭발한 것을 두고 농담을 하자,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


결국 윌 스미스는 아카데미 회원에서 자진 사퇴했고, 별도의 처벌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배역을 맡았던 영화들도 준비가 중단됐다. 먼저 모욕을 당한 입장임에도 부적절한 대응으로 많은 걸 잃게 된 거다. 그의 선택은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행동에는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치다니, 안 될 말이지' 싶으면서도, 솔직히 말해 모욕당한 순간 뚜벅뚜벅 걸어 나가 한 방을 날리는 강단은 부러웠다. 나로선 절대 못할 행동이니까.

나는 억울함의 아이콘이다. 최소 하루는 지나야 내가 화난 걸 알아차릴 정도로 감정에 무뎠다. 가족과 연인 관계에서도 갈등을 피하고, 직장에서는 감정노동을 하고, 길에서 황당한 일을 당해도 참았다.

화병, 우울증, 사회공포증을 겪으며 비로소 잠재된 분노가 표면으로 올라왔다. 지금도 몇 달 전, 몇 년 전 당한 모욕들이 떠올라 앵그리버드 같은 얼굴로 씩씩거린다. 사실 상대방보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왜 그때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을까? 기분 나쁜 티라도 내지!

분노 사용의 중간단계
 

교과목 중 <감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감정을 잘 흘려보내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우리 문화는 분노, 원망, 좌절, 우울 등을 서둘러 통제하도록 요구하는 경향이 짙다. 나도 "자기 목소리를 내라"는 말 대신 "둥글둥글해야 예쁨 받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사회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바쁜 분위기에서 자기감정을 들여다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표출되지 못한 분노가 우울과 무력감이 된다고 지적한다. 음식물쓰레기를 오래 두면 냄새가 나듯 감정도 외면하고 묵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억눌러둔 감정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다. 온라인 댓글창의 무분별한 인신공격도 이와 동떨어진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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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해방하기 붓다는 원한을 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던질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러나 감정을 외면하고 묵살한다면, 이건 석탄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라 가슴에 품어 오래도록 화상을 입는 일에 가깝다. ⓒ freepik

 
대화 상황에서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이 온라인에서 많이 공유된다. 잠시 침묵하기, 들은 말 그대로 반복하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묻기, 상처 받았음을 표현하기 등등. 그러나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다. 화내기 하수들에겐 이것도 난이도가 있다. 표현과 거리를 두고 산 사람일수록 도움닫기가 필요하다.

먼저 거쳐야 할 것은 '알아차림'의 과정이다. 오래 감춰둔 분노에 분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기 안의 분노를 천천히 느끼는 것. 분노가 올라올 때의 신호를 알아채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 평소 그럴 때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열이 오르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 생각의 진행이 멈추는 것도 불쾌감의 신호일 수 있다. '내가 지금 화가 나는구나' 하고 인지하게 되면, 그 분노를 자신을 위해 쓸 여지도 갖게 된다.

분노 뒤에 숨은 욕구 찾기

어떤 분노는 비슷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박우란 정신분석가는 정서적 방식을 넘어 분노를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계속 마음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문제가 있다면 어떤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인지 들여다봐야 하고, 욕망을 알아차리면 더 건강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쓰게 된다는 설명이다.

내게도 화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있다. 권위적인 목소리, 자기자신의 무지를 전제하지 않는 오만함, 내 마음에 대한 존중 없이 관계에서 어떤 역할만을 강요하는 태도를 대할 때 어김없이 피해의식이 발동한다. 거기에는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마음, 나다움이 배제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욕구를 탐색할 때 글쓰기는 꽤 괜찮은 방법이다. 자신을 메타적으로 보며 감정에 맞는 언어를 찾아주는 과정은 감정이 자기 통제 아래 있다는 효능감을 준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답을 찾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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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감정조절 효과 에는 뇌과학적 근거가 있다. 부정적 감정은 뇌의 ‘대뇌변연계’에서 생겨나는데, ‘생각하는 뇌’인 ‘대뇌신피질’이 활성화될 때는 이러한 감정에 제동이 걸린다. 감정이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사고를 통해 분석하는 작업이므로 대뇌신피질이 활성화되어 냉정함을 되찾게 된다. ⓒ freepik

 
나는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미리 써본다. 내가 배운 '잘 털어놓는 방법'은 이렇다. 우리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하는 얘기란 걸 밝히고 내가 느낀 것들을 나를 주어로 해서 담백하게 쓴 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제시하는 것. 하지만 처음에는 일단 쏟아내는 게 제일이다. 그 과정에서 얘기를 전해줄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풀린 적이 많다. 

그 후에 글을 다듬어 완성하면 저장해둔다. 원할 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화를 '보류' 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써둔 글을 더 나은 시점에 전달해서 관계가 좋아진 일도 있다.

이제 작은 화는 혼자서 해소하는 팁도 여럿 갖고 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 굉음에 맞춰 소리지르기, 혼잣말로 욕하기도 특효다. 별 거 아닌 듯해도 '개비스콘 짤'을 실현한 듯 속이 많이 풀린다. 이 좋은 것들을 안 하고 살았다니!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것도, 감정의 물길을 어떻게 터줄지 방향을 정하는 주체도 나임을 직시하면서 분노와 원망, 억울함에서 약간은 자유로워졌다. 이건 자기 탓과는 다르다. 남에게 맡겨뒀던 감정의 주도권을 나에게 가져오는 것이다. 

분노라는 생명력

크리스 록이 선 넘는 농담을 한 것과 별개로 그의 대응을 높이 사는 의견이 많다. 그는 폭행을 당한 직후에도 너스레를 떨며 시상식 분위기를 유지하고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다. 이런 태도는 성찰성(reflexivity)을 보여준다. 자신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며 '보여지는 나'가 유머러스하거나 냉정하게 변론자의 배역을 수행하게 하는 것은 모욕과 수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하지만 이런 노련함에는 삶 자체를 공연처럼 만드는 양면적 속성도 있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자신과 분리해 지켜보는 것은 삶을 생생한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통제를 포기한 분노는 자신까지 덮쳐버리지만, 물길을 막아둔 분노는 마음속에서 썩는 것이다.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하는 성찰성을 갖추는 데는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분노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오해와 달리 분노는 생산적 감정이다. 밖으로 분출되어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리아 루고네스 같은 분노 옹호자들은 분노가 불공평에 대항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실감한 경험이 있다. 나는 20대에 해외봉사단원으로 일했는데, 행정보복을 당한 걸 뒤늦게 알았다. 내가 활동기간 중 부당한 요구를 거절해 파견사무소 측과 자주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단원평가에서 어떤 기준도 없이 최하점을 받은 것이다. 그때까진 갑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없었고, 해당 직원이 그만둔 뒤라서 수정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가슴에서 굵직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제출했던 성과 보고서들과 활동 자료, 현지어능력 인증서류 등 소명 근거를 취합해 국민신문고에 건의했다. 이제라도 단원평가의 기준을 세우고 파견 단원들에게 공지하도록 제도를 개선해달라는 요구였다.

한 명의 건의로 제도가 바뀔까 싶었는데, 다음 파견 기수부터 단원평가 제도에 기준이 생겼다. 당한 일은 억울하지만 이 일로 용기와 희망도 얻었다. 정당한 분노가 적절한 절차로 표출되면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목소리 내기에 익숙하지 않은 내 안에도 그 힘이 있었다.

분노는 삶이 정체돼 있을 때 앞으로 치고 나가는 에너지가 된다. 필요한 건 분노와 충분히 친해지는 시간이다. 루고네스가 제시한 분노 유형 중에는 '존중을 요구하는 분노', '체면에 도전하는 분노', '관대한 분노'가 포함된다. 약자에게 휘두르지 않고 억압된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관대한 분노는 세상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농익은 분노는 사랑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는 날마다 고요히 앵그리버드 상태지만, 분노라는 생명력과 친해지는 중이기도 하다. 세련되게 되갚지 못한 모욕이 많아도 좋다. 언젠가 그 힘에서 독기가 빠지면, 세상을 향해 날리는 괜찮은 한 방이 될 수도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참고 자료
- '성찰성'에 대한 기술: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 글쓰기 효과의 뇌과학적 설명: 홋타 슈고,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 서사원.
- 계간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Vol.5, 바다출판사.
- 계간 '우먼카인드 코리아 Womankind korea' Vol.14, 바다출판사.
- 박우란 정신분석가 인터뷰 영상: 남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것' (박우란 정신분석가) https://www.youtube.com/watch?v=KCKWTCMhG_Y
- 윌 스미스 관련 기사: 윌 스미스 ‘따귀 값’ 혹독…아카데미 처벌·아내 사생활 출판 (서울신문, 22.04.07.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407500049&wlog_tag3=naver)
#분노 #윌스미스 #크리스록 #아카데미시상식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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