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1980년 6월 2일 신문을 재발행한 후 5.18묘역을 찾아 5.18 관련 보도를 하지 못한 것에 사죄하고 참배했다.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하지만 기자들은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나경택(72) 전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는 흰색 점퍼 안에 두 대의 카메라를 숨긴 채 취재를 이어갔다. 그는 "신문 발간이 중단된 후 기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거리로 나가 취재를 이어간 기자도 많았다. 당시 나는 빌딩에 숨어 사진을 계속 찍었다"라고 말했다.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장면, 한국은행 광주 지점 앞으로 실려온 시신, 전남도청을 가득 메운 채 거리에서 주먹밥을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계엄군은 광주시민을 폭력진압하는 동시에 신문 제작을 중단한 기자들을 끊임없이 협박했다. 문순태(82) 전 전남매일신문 부국장은 "계엄군이 새벽부터 전화해 무조건 나와서 신문을 만들지 않으면 신문을 폐간 시킨다고 압박했다"라며 "폐간되더라도 신문을 만들 수 없다고 버텼는데, 광주의 아픔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겨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속간의 이유를 밝혔다.
결국 10일 후인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이 다시 발행됐다. 신문을 제작한 문 전 부국장은 "결국 창간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발행하자고 결정했다"라며 "진실을 기사로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신문 지면을 채우자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6월 2일, 전남매일신문 1면에 '애독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필설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참극을 참고 견디신 애독자 여러분 앞에 보은 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로 시작한 속간의 말이 담겼다.
"기사로 진실을 전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광주의 현실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급하게 김준태 시인에게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죠. 당시 신군부 언론검열관실 검열관은 김 시인이 쓴 120행 시 중 80행을 '삭제'하고, 나머지 40행은 '재고 요망'이라고 붉은 글씨를 써서 내려보냈죠. 하지만 그 40행을 그대로 신문 1면에 넣었습니다."
문 전 부국장은 "'광주사태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사원 일동 명의의 7단 광고를 실어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김준태 시인의 시 '아 광주여'라는 시를 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문 발행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계엄군에 미운털이 박힌 기자들은 8월부터 강제 해직됐다. 이후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 정책에 따라 1980년 11월 29일 전남매일신문은 전남일보와 강제로 통합됐다. 기자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5.18 진실규명은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