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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총영사가 이것 지으려고 사들인 서울 정동 땅

서울에 남은 오래된 러시아의 흔적, 옛 러시아 공사관 전망탑

등록 2021.06.28 07:23수정 2021.06.28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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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서울시청 일대 중구 정동 언덕은 한양에서 도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이국적인 얼굴을 한 3층으로 솟은 하얀색 전망 탑이 덩그마니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사라지고 남은 옛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다.
  

옛 러시아 공사관 3층 전망 탑 새하얀 몸체로 단장하였으나, 보수 작업 중 드러난 3층 아치창은 붉은 색 벽돌로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 현재 보수 중이다. ⓒ 문화재청

 
남하하는 러시아

부동항(不凍港)은 러시아에겐 생존의 문제다. 그들은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끊임없이 남하(南下)하면서, 비옥한 토지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확장정책을 펴온다. 17세기엔 북해와 발트해에서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고, 19세기엔 크림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한다.


이는 서유럽 국가들에게 주요쟁점이자 위협이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된다. 특히 영국과의 마찰이 극에 달한다. 두 나라 주요 격전지는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중국과 동아시아다. 1860년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으로 만주에서 영향력 확대와 연해주를 획득, 블라디보스토크를 극동 진출 교두보로 삼게 된다.

러시아가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자, 1883년 11월 영국이 먼저 조선과 수교해 버린다. 그러자 러시아가 다급해진다. 청에서 영사관으로 근무 중인 베베르(K. I. Waeber)를 조선에 급파한다. 그의 임무는 통상조약 체결을 통한 조선과 만주 경영이다.
  

조아통상조약문 1884년 7월 체결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 문서 ⓒ 문화재청


1884년 7월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다. 초대 총영사는 베베르다. 그는 무척 예의바르고 신중하며 냉철한 인물이다. 곧장 고종의 신임을 얻는 한편 고위 관료와도 두루 사귄다. 부인을 동원하여 왕비의 환심도 사둔다. 인척으로 알려진 손탁이 궁궐 양식조리사로 일하며, 궁궐 내부 깊숙한 곳에서 베베르의 손발처럼 움직인다.

공사관 건립

베베르는 조선에서 영국에 맞서는 위용을 과시하고 싶다. 도성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공사관을 짓는 일이다. 그가 선택한 땅은 경복궁과 경운궁, 경희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정동 언덕이다. 여러 경로로 부지구입 협상을 벌이나 순조롭지 못하다. 협상은 1년 이상을 끈다.

그가 1884년 11월 러시아에 보낸 '한양 공사관 유지금 내역 상신서'에는 '부지 매입비 5천 달러와 건축비 6만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5년 11월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엔 '좋은 부지를 찾았다. 이 언덕 낮은 곳에 미국 공사관, 영국 영사관 등이 있다. 조선은 부지 2㏊를 2천2백 달러에 매입할 것을 제의해 왔다'고 보고하며 부지 지도를 첨부한다.
  

옛 러시아 공사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러시아 공사관. ⓒ 문화재청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도쿄 쉬페이예르에게 '베베르에게 속히 2천2백 달러를 송금하라'는 전문을 보낸다. 5천 달러 땅이 1년 후 2천2백 달러가 되었다. 당시 2천2백 멕시칸달러는 쌀 1,100가마 가격이다. 공사관은 1885년 착공하여 1890년에 완공된다. 당시 한양에서 제일가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인접한 영국 영사관을 능가하는 규모다.


가련한 조선 국왕

왕비가 정점인 세도정치에 나라가 녹아난다. 양반은 면허받은 흡혈귀고, 백성의 궁핍은 더 이상 빼앗길게 없는 최악의 안락한 곤궁 상태다. 나라가 외세 침탈을 받아도, 왕이 바보 취급을 당해도 백성들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1894년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왕비는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인다. 일본군도 같이 밀려들어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조선 땅은 처참하게 유린당한다. 그 사이 7월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 조선 조정을 박살낸다. 그리고 꼭두각시 친일내각을 들여앉힌다.

일본은 친일내각을 앞세워 내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전쟁 결과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 섬을 차지하나, 삼국간섭으로 곧바로 요동반도를 되돌려준다. 이를 주도한 러시아와 베베르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진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왕비와 결탁의 끈을 맺어, 친일내각을 해산시키고 친러·친미 관료를 들여앉힌다.
  

건청궁 옥호루 1895년 10월 8일,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장소인 건청궁 옥호루. ⓒ 문화재청

 
일본이 공사관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로 바꾼다. 목적은 즉자적인 테러다. 부임 37일째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궁궐을 침범, 건청궁에서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한다. 여기에 우범선, 이두황 등 내부 협력자와 동조자가 우글거린다. 왕비의 죽음은 이를 목격한 외국인을 통해 알려진다. 그 중 한 사람이 세레딘-사바틴(A. I. Seredin-Sabatin)이다. 조선 조정을 장악한 일본은 친러·친미 관료를 내쫓고, 친일내각을 다시 들여앉힌다.

유약한 왕은 궁에 갇힌 포로 신세로, 자신이 독살 당할 거라는 의심으로 식음마저 전폐한다. 오로지 언더우드 등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이 건네주는 음식으로 연명한다. 날달걀과 연유다. 미국 선교사들이 번갈아 불침번을 선다. 하루하루가 치욕스런 수인 아닌 수인의 나날이다. 왕비의 죽음과 단발령으로 의병이 일어나지만, 그저 수구세력의 반발에 불과하다. 이들 힘으론 일본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그해 11월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켜 친일내각을 전복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수포로 돌아간다. 러시아가 자국 공사관보호 명분으로, 인천항에 정박 중인 군함에서 수병 100명을 한양으로 진군시킨다.

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국서를 보내나, 그저 살려달라는 구차한 밀서에 불과하다. 베베르는 친러파 이범진을 준동시킨다. 도성은 의병진압 명분으로 경비가 소홀하다. 엄 상궁 도움을 받은 왕이 여인의 복식을 차려 입고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1896년 2월 11일 아침이다.
  

아문이 보이는 공사관 사진 중앙에 독립문을 닮은 아문의 모습이 선명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영천_정동공원 현장자료촬영

 
파천은 과분한 상찬이다. 겨우 수인 취급을 벗어났을 뿐이다. 아관에서의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에 의해 서대문은 폐쇄되고, 정동 일대는 통행이 금지된다. 일본군 1천여 병력이 러시아 공사관을 에워싼다. 공사관을 경비하는 러시아 수병은 160여명에 불과하다. 일촉즉발이다. 대포까지 끌고 와 시위하며 왕의 환궁을 추궁한다.

왕은 베베르를 신뢰한다. 친러 내각이 세워진다. 단발령을 철회하고 김홍집과 유길준 등 을미4적을 처결한다. 모든 일을 베베르와 상의하여 처결하라 명한다. 러시아와 열강이 조선에서 여러 이권을 차지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왕이 공사관에 1년 9일을 머무른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밀약을 하는 사이, 왕은 겨우 왕정을 돌려 세우는데만 골몰한다. 그 결과가 대한제국이다. 황제는 광무라는 연호를 쓰면서 근대화를 표방하나 정치·경제·사회는 이미 일본 손아귀에 꽁꽁 묶여버린 뒤다.

러시아 공사관
  

최초 설계 당시 공사관 배치도 2ha의 면적에 남북으로 건물군을 분리해 배치한 최초 설계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배치도이다. 사진 하단의 본관 일원이 현재의 정동공원이다. ⓒ 문화재청_연구용역 자료에서 재인용

 
공사관은 부지 2만㎡에 약 7.78만 달러를 들여 1890년 8월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토목기사 F. 류바노프의 최초 설계를 세레딘-사바틴이 아치를 변형시키고 전망탑을 추가했으며, 베란다 및 입면과 방 배치를 조절하여 완료한다.

본관 건축면적은 5414평방피트(약503㎡)로 2.66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3면 파사드(Facade)를 아치로 장식하고 안으로 창문을 들였다. 본관 외에 서기관 관사와 각종 주거동, 주방동, 세탁동, 경비동 및 마구간까지 갖추었다. 정문에는 러시아 게이트, 혹은 아문(俄門)이라 부르는 붉은 벽돌로 만든 독립문을 닮은 문이 있었다.
  

수리하는 3층 전망 탑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본관 외 유일하게 남은 3층 전망 탑을 1973~74년 수리하는 모습이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1973년 전망 탑을 현재 모습으로 단장한다. 전망 탑은 석재에 회색과 붉은 벽돌이다. 이로 미루어 공사관도 같은 재료를 사용해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1981년 발굴 때 경운궁과 공사관을 잇던 폭 45cm, 길이 20.3m 지하 비밀통로가 발견된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머물던 곳은 르네상스 풍의 가장 화려한 방이었다. 1896년 초, 조선을 돌아본 러시아 군인 일행이 남긴 기록에 공사관과 그 주변이 비교적 잘 묘사되어 있다.
 
잠시 후 우리는 붉은 돌로 된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담 안으로 러시아 제국의 웅장한 공사관 건물이 보였다…(중략)…공사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터가 매우 넓었고 도읍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큰 건물 이외에도 작은 건물이 네 채 있었다. 베베르는 공사관과 부지를 포함해 3만3천 루블이 들었다 한다. 건물 뒤엔 헛간이 달린 작은 곁채와 정원이 있는데, 그곳에 토종 비둘기들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울타리 왼편에는 독서실과 당구장이 있는 외교관 클럽이 있었다.
  

옛 러시아 공사관 전망 탑 2015년 촬영된 옛 러시아 공사관 3층 전망 탑. ⓒ 문화재청

 
한 마디로 지금에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화려함을 갖춘 건물로 읽힌다. 공사관 설계자 사바틴은 손탁 호텔을 비롯, 서울에 서양식 근대건축 여럿을 설계한 인물이다. 러·일 전쟁으로 조선을 떠나기까지 20여년, 그가 설계한 여러 건축물이 그대로 유산으로 남게 된다.
덧붙이는 글 1. 옛 러시아 공사관 3층 전망 탑은 당초 2020년 11월 27일까지 보수하기로 하였으나, 2021년 6월 현재도 보수 작업 중으로 사진 촬영 등이 불가능하다.
2. 옛 러시아 공사관에 대한 세세한 사항은, 문화재청이 발주하고 (사)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수행하여 공개한 '사바틴과 한국근대기의 건축 영향관계 연구' 74~93p에 일목요연하게 수록되어 있다.
#옛_러시아_공사관 #베베르_사바틴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시아_남하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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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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